비록 세상이 멈출지라도
By 솜하
한 번이라도 눈을 마주치면 석화되고 마는 신화 속 괴물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시야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했다는 하찮은 이유로 부드러운 살과 뜨거운 피를 지닌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무력하게 굳어갔다. 그래서였을까. 현세를 휩쓸어버린 역병은 그 괴물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메두사 신드롬.’
20XX년, 세상은 멈췄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두 종류였다. 굳어있는 사람과 굳어버릴 사람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들은 후자에 속했다. 뭐, 안타깝게 되었지.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검은 노트를 감싸는 먼지의 두께가 이들의 최후가 언제였는지 침묵으로 증언했다. 전에 순찰 갔던 사람들에게서 들은 바로는 이 노트가 간신히 뼈대를 유지하고 있는 허름한 건물에서 나온 유일한 물건이었다고 한다.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당도했던 자들이니 뭐라도 건질 내용이 없나 싶어 들고 왔다는데 별 소득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심심풀이용으로는 좋을 거라며 대장이 아무렇게나 패대기친 노트는 돌고 돌아 내 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아무리 봐도 이들 중 마지막으로 들어온 내게 짬처리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마침 지루하던 터라 순순히 받아들였다.
노트를 펼치자 먼지가 잠시 허공에 머물다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바랜 종잇장에서 피어오른 가느다란 화약 냄새가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매캐한 향에 절로 미간이 찡그려지며 기침이 나왔다. 손을 휘휘 저어 먼지와 잔향을 밀어내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가 쓴 것 같은 비뚤비뚤한 글씨였다.
‘두목과 ■■■의 일지!’
중간이 찢어져 있었다. 아니, 새카맣게 물들여져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해질 정도로 힘을 준 상태로 볼펜을 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우려던 흔적은 무엇이었을까. 손바닥만 한 작은 노트는 과연 내게 어떤 이야기를 건네줄까.
달빛에 기대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조금 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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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앵그리 바의 전기가 끊긴 지 오래다. 어떻게든 버티려 했는데 결국 이곳을 떠나야 했다. 마지막으로 어르신과 연락했을 때가 약 일주일 전. 대협이랑은 연락이 안 된다.
최종 목적지: 광화문
사람들이 허공을 응시하며 가만히 서 있다. 도시가 조용하다. 어차피 도로에 아무도 없으니까 차나 하나 쌔비려고 했다. 근데 시동만 걸었는데 얘들이 초점 맞추면서 걍 걸어가자고 한다. 쥰내 너무하네... 내가 장롱면허인데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안전벨트 안 맨 건 너무하지 않아 두목? 시끄러워 인마. 먹을 건 아직 충분해서 다행이다. 얘들은 이게 소풍 나온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뭐, 신나 보이니까 괜찮겠지. 두목이랑 같이 있으면 어디라도 좋지. 고맙다. 춥다. 우동 먹고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뜻한 옷 더 챙겨 올걸. 어떤 얘가 머플러 가져가서 이불로 쓰고 있는걸 봤다. 목이 횅하다. 읏추읏추.
오늘 들어간 건물에 사람이 기괴하게 뒤틀려진 채로 굳어있어서 놀랐다. 얘들도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자꾸 옆에 붙어서 안 떨어지려고 한다. 말랑말랑하네. 기록한다고 노트는 구했는데 더 뭐 적어야 하지. 쓸 말이 더 생각 안 난다. 아 맞다 몸 상태.
얘들 상태: 양호함. 응원봉이랑 드럼통은 언제 또 들고 나왔는지 잘 꺼내서 쓰고 있다. 근데 대체 어디에 보관을 하길래 금방금방 꺼내는 거지..?
내 상태: 양호함. 밥 안 먹은 거 얘들한테 들키면 안 됨. 저 사람들처럼 변하기 전에 안전한 곳에 얘들 데려다 놔야 함. 어르신 쪽은 아직 괜찮다고 하니까 믿고 맡겨야겠지.
1월 22일
핸드폰 전원이 꺼짐. 노래 못 듣는다. 빌어먹을. 얘들이 휴대폰 가게 털겠다고 빠따 드는 걸 겨우 말렸다. 진정 좀 해 얘들아. 나중에 충전할 수 있는 곳 찾으면 되니깐.
역시 매일 쓰기는 귀찮다. 자고 있던 사이에 얘들이 뭘 되게 열심히 보길래 몰래 지켜봤다. 그게 이 노트였을 줄이야. 별 내용 없는데 뭐가 그리 궁금한 거지. 꼼질꼼질 낙서나 하고 말이야 으에잇! 두목 귀여워. 귀여운 것보다는 멋있는게 더 좋은데... 니들이 좋으면 됐다 에휴.
아직도 굳어있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저마다 다른 자세를 하고 있어도 한 가지는 똑같다. 무언가 겁에 질린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다. 뭘 본 걸까. 나는 안 보고 싶은데. 초기에 스트레칭을 하는 게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자주 나오길래 따라 해 봤지만, 나중에 가짜뉴스라고 떴을 때 얼마나 빡쳤는데... 요즘에는 이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얘들 데리고 매번 하는 중이다. 괜히 손가락도 많이 움직여 보는 중.
얘들 상태: 건강함. 가끔 널브러져서 안아달라고 하는 얘들은 있음. 근데 그러면 나머지들도 굴러다니기 때문에 토게피하는 중. 그래도 내 걸음 따라오는 거 힘드니까 가끔은 어깨에 작은 친구들 위주로 올려놓는다. 살짝 무겁긴 한데 버틸만하다.
내 상태: 괜찮음. 밥 안 먹은 거 걸려서 무서운 일을 당함. 이거 괜찮은 거 맞나?
또 안 먹기만 해봐 그때는 더 무시무시한 일을 당할거야! 호고곡.. 장난이겠지?
1월 27일
핸드폰 충전 성공.
얏호!
그리고 대협이랑 연락이 되었다. 문자에 오타가 많았다. 두목도 맞춤법 잘 모르잖아. 쉿. 만두가 대신 타자를 쳐 주고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봤는데 대협이 자는 사이에 눈꺼풀이 굳어서 앞을 못 본다고 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평소와 같은 목소리가 음, 난 괜찮소이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광화문에서 어르신과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전달해줬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대협은 강하니까 돌아다니는 깡패들한테도 당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사람 목소리를 들으니까 좋았다. 두목 우리도 사람이야 사람!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어르신은 연락을 받지 않는다. 지난번에 딱 한 번 신호가 닿았던 적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가 끊어졌다. 몇 번을 다시 걸어 보아도 공허한 울림만 반복될 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단순히 핸드폰이 망가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 노인네가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니까. 옛날에도 아득바득 살아남은 사람인데 이번에도 잘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얘들 상태: 조금 지쳤다. 요즘 자주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렇게 있으면 더 따뜻한가 보다. 나도 껴줘 얘들아. 많이 버티기 힘든가... 천천히 가도 괜찮겠지. 중간에 머물 장소를 더 잘 찾아봐야겠다.
내 상태: 괜찮음. 이번에는 얘들 보는 앞에서 밥 먹어야 했다. 초점 맞으면 무서워 얘들아...
1월 31일
노래는 앞으로 안 듣는 게 낫겠다. 우리의 위치를 들킬 뻔했다. 다친 얘들은 없어서 다행이다. 다리가 굳어도, 팔이 굳어도. 한 시라도 생을 더 연장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우습게 보면 안 될 일이었다. 앞으로 명심하자. 핸드폰 베터리도 아껴야 한다. 다음에 언제 또 충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와 일하는 두목 멋있다! 내려가 있어 나 바쁘다.
유치원 다니는 얘들이 길을 잃지 않게 기다란 줄을 잡고 걸어 다니는 걸 본 적이 있다. 머플러를 활용해서 잡고 다니니까 꽤 괜찮았다. 어차피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얘들을 앞세워서 걷게 하고 내가 뒤에서 따라가면 될 것 같다. 요즘은 눈이 내리고 있다. 길도 미끄럽고... 천천히 가는 게 더 좋지. 그리고 눈이 오면 얘들이 안 보인다. 세상이 하얗다. 그 속에 나만 검다.
경찰서를 발견했다. 분명 아무도 없었다. 그 자식이 거기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들처럼 굳어있지는 않았다. 그런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았다. 얘들은 보지 못하게 했다. 봐봤자 썩 좋은 꼴은 아니다. 근데 분명 총을 사용한 것 같은데 주변에 보이지 않는다. 차가웠다. 글을 길게 쓰는 취미는 없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요즘 얘들이 뭔가 준비하는 것 같다. 뭐 하는 걸까 궁금하다. 그래도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아서 좋다. 이런 현실에 상처받는 얘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얘들 상태: 슬슬 체력이 닳는 주기가 빨라지고 있다. 그냥 내가 얘들을 들고 이동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드럼통 하나 쓸만한 거 주워서 담아볼까?
내 상태: 괜찮다. 아마 그럴 것이다. 목이 조금 아픈 정도?
2월 2일
주변에서 총성이 들린다. 다들 많이 놀랐다. 여전히 목이 따끔거린다. 기록할 시간 부족함.
2월 3일
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두목 생일 축하해!
2월 9일
얘들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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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노트는 한동안 공백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그의 기록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은 몇 달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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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어르신 쪽도 일이 많았던 모양. 어르신 걷지 못함. 다리가 굳었다 한다. 드디어 노인네 지게 태우는 거 쌉가능이다. 대협이 많은 것을 도와주고 있다. 역시 눈은 멀었어도 정파는 정파다. 아주 강력해서 믿음직스럽다. 슬슬 잉크가 다 떨어져 간다. 노트로 소통해야 되는데 빨리 다른 펜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성대가 굳었다. 노래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내 소리를 들을 얘들은 내 옆에 없으니까.
5월 15일
주변에 다른 잔당들이 돌아다니는 모양. 어르신한테 총 주고 대협과 둘이 순찰 도는 중. 아, 대협도 이곳에 도착했을 때 혼자였다고 했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고 가만히 있다. 대협이 바라보는 하늘은 더 이상 창천이 아닐 것이다. 어르신은 다시 낯선 곳에 떨어졌다. 결국 우리는 모두 멈추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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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는 여기서 끝났다. 잉크가 떨어진 볼펜으로 무어라 쓰려다 포기한 흔적만 날카롭게 남아있었다. 펜을 꺼내 들었다. 저 문장의 마무리를 지어 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당신은 뭐라고 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