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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외근

By 샤라라

*유혈, 폭력 주의

 

2Xxx.X.X 월요일

 

사이보그 2

분해형 500

정찰용 300

기타 400 척결

 

二Xxx.X.X 水曜日

 

금일 기계들을 파괴했소. 수는 표로 첨부했으니 확인해주시게.

 

2Xxx.X.X 금요일

 

평소와 똑같습니다. 이상한 점은 없습니다.

 

  화면에 띄어진 보고서를 본 교장은 책상을 두드렸다. 교장실에 불러온 셋은 보고서 때문에 불려온 게 어이없었다. 셋보다 더 개판으로 보고서를 쓰는 선생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원래 처음엔 장황하게 쓰다가 간결하게 쓰는 게 아닌가. 처음 일 배울 때 제일 먼저 들었던 말이 ‘보고서는 대충 써도 됩니다.’ 였다. 교장도 지금까지 보고서로 꼽을 준 적은 없었다. 아무 말도 안 하다가 갑자기 자신들을 호출하며 보고서를 언급한 게 어이없었다. 따지고 싶은 말이 한 가득이었지만, 상사 앞이라 셋은 애써 웃었다.

 

  “남궁혁 선생님, 향아치 선생님, 앵보 선생님.”

 

  교장이 웃으며 그들을 차례로 호명했다. 교장이라는 직책과 다르게 이 교장의 얼굴은 매우 젊었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40대 초중반이었다. 사건이 벌어지고 학교가 세워지고 교장직을 맡은 지 70년이나 지났는데 얼굴은 변함없었다. 얼굴이 젊어도 몸에서 티가 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남궁혁을 포함해 운동부 소속 선생님들은 교장의 몸이 얼마나 건강한지 아주 잘 알았다. 신기한 건, 교장은 맨날 교장실 책상에 앉아있는데 지나치게 건강했다. 허리도 그렇고, 거북목도 아니었다.

 

  젊은 얼굴과 건강한 신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은 교장의 외형에 말들이 많았다. 인간인지 아닌지 무수한 소문이 돌았으나 누구 하나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교장이 불로불사의 약을 만들어 성공했는지, 저 바깥에 있는 사람을 닮은 기계 덩어리인지 알 수 없었다. 다들 궁금해하지만, 교장에게 직설적으로 물어보지 못했다.

 

   떠돌아다니는 소문으로 내비두는 게 나을 수 있었다. 소문의 결론은 그래도 아니겠지로 끝났다.  상상으로 무수한 결론을 낼 수 있지만, 사실은 결론이 하나였다. 끔찍한 사실을 직시하는 것보다 그럴듯한 소문에 둘러쌓여 사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선생님들이 외근 점수가 제일 높은 거 알죠? 아, 물론 교사로서 훌륭히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도 압니다. 선생님들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우리 환원(還元) 학교의 위상도 높아지니까요.”

 

  교장의 말에 셋은 한숨을 쉬었다. 맞는 말이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보통 교장이 저럴 때 외근 일을 잡을 때였다.

 

  환원(還元) 학교는 현직 교장이 로봇에게 지상을 탈환하며 세운 학교로, 인적 자원을 충분히 확보해서 다시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목표로 세워졌다. 모든 사람이 이 학교에 입학하는 건 아니었고, 자신이 희망하는 분야에 얼마만큼 뛰어난 재능이 있는지 시험을 치러야 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자질을 평가하며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다.

 

  교장은 누구를 뽑아야 할지 입김도 불지 않았고, 선생님들도 공정하게 학생들을 뽑았다. 지상에서 마음 편히 자고, 먹고, 아프면 치료 받을 수 있으며 무상으로 교육받고, 졸업 후에는 취업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학생들 중 교사가 된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살기 위해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장은 싱긋 웃으며 손을 깍지 낀 채 턱 밑에 갖다 댔다. 저 자세를 해도 여전히 허리를 꼿꼿하게 펴는 게 징그럽게 느껴졌다. 저래서 아직도 허리가 휘지도 않고, 거북목도 아닌 것 같았다.

 

  “남궁혁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유일한 무림인이시죠. 꾸준히 수행한다는 가르침 너무 좋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 노력을 하지 않고 최고가 되려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뭐, 그걸로 먹고 살았던 제가 그런 말 처지는 아니지만요. 선생님의 올바른 가르침 덕분에 학생들도 건강하게 잘 수행하며 훌륭한 무인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옛날에 오래 살고 싶어서 반로환동에 대해 알아봤는데 쉽지 않네요.”

 

  셋의 시선은 교장이 아니라 아직도 띄어진 보고서로 향했다. 너희가 이 정도로 뛰어난데 왜 보고서가 저따위냐고 돌려 말하는 기분이었다. 그럴거면 처음부터 자세하게 쓰라고 말해주던가. 일 잘해도 교장실에 들어와도 잔소리라니. 교장이 앞에 없었다면, 셋은 동시에 한숨을 쉬고도 남았다. 교장은 이번엔 향아치를 보며 말했다.

 

“우리 향아치 선생님도 대단하죠. 대한제국에서 오신 분 아닙니까. 다행히 여기선 더 알 미래가 없죠. 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선생님 덕분에 학생들이 역사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선생님 아니었으면, 여긴 제대로 된 역사를 보존도 못 하고 망했을 겁니다. 제가 한국풍을 엄청 좋아하는데 관련된 지식이 없으니 힘들더라고요. 선생님 덕분에 제가 아주 잘 즐기고 있습니다. 지원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죠.”

 

  이번엔 교장의 눈으로 앵보로 향했다. 앵보는 왜 훈화 말씀이 지겨운지 교장을 통해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리 앵보 선생님도 마찬가지죠. 사실 저는 제 안목을 믿고 있습니다. 한눈에 보면 자질이 있고 없는지 다 보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선조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전혀 그러지 못했습니다.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무기 개발을 꾸준히 하지 않았습니까. 그 덕에 우리 학교 보안도 올라가고, 위상도 높아졌습니다. 선생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사실 교사 제안 거절할 줄 알았어요.”

 

  앵보는 무기 기술을 운운하는 교장에 화가 났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교장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었다. 미소 지으며 외근만 뺑뺑이 돌리거나, 한 달 내내 당직(을 가장한 경계근무)을 서거나 교장의 서류 처리를 대신하는 일을 주곤 했다.

 

  앵보는 한숨부터 나왔다. 방송부 선생이자 비밀리에 무기 개발 팀장까지 맡으니 일에 깔려 죽을 것 같았다. 이럴 때만 부하들이랑 학교 밖에서 기계들 해치울 때가 그리웠다.

 

  교장은 앵보의 머리카락이 가만히 있는 걸 보곤 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교장은 그대로 의자를 돌렸다. 책상 뒤로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푸른 하늘 때문에 날이 밝아 보였지만, 교장실 안으로 햇살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구름도 움직이지 않았고,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없었다. 그냥 언제나 같은 풍경 사진을 보여주는 커다란 사진 앨범 이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교장실에 들어오는 걸 꺼려했다. 교장실에 있다보면 시간 감각을 알 수 없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고, 날씨도 헷갈렸다.

 

  “하하, 혼내는 거 아닙니다. 제가 왜 유능한 선생님들의 기를 죽이겠습니까. 할 말도 있고, 외근도 있어서 부른 겁니다.”

 

  “혹시 보고서 양식이 있는가?”

 

  향아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관리 출신이다보니 이런 거에 예민했다. 특히 향아치는 역사부 총괄을 담당했기 때문에 불안했다. 보고서 양식이 있으면 다시 선생님들한테 양식을 배포하고 다시 결재해야 했다.

 

  “아니요. 가장 실적이 좋은 선생님들의 보고서가 어떤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아서요. 찾아보니까 저렇게 심플해서 어떡하나, 하고 있었습니다. 뭐, 보고서는 제가 어떻게 예쁘게 꾸며서 공개하겠습니다.”

 

  혼자 알아서 처리할 거면서 왜 저런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진짜 구리게 보고서 내줄까. 가끔은 주먹으로 해결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일부러 사람 속을 긁으며 어디까지 참는지 간 보는 것 같았다. 아주 심각한 일인가 해서 달려온 자신들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교장은 다시 의자를 돌려 셋을 바라봤다. 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선생님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학교 세운 사람의 미소는 좋게 보이지 않았다. 들었을 때는 취지가 좋지만,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학교를 위해 희생하는 구조로 운영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에 공감하지만, 이것까지 해야 하나 싶은 일도 있었다. 선생님 사이에 불만이 어느 정도 나왔지만, 학생들에게 불이익이 갈까봐 참는 분위기였다.

 

  “선생님들. 전 유능한 사람들을 아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일을 자주 맡기는 거죠. 물론 학생분들은 저를 싫어하겠지만요. 하하, 오늘 수업도 못 한다고 저를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교장의 말에 셋은 웃을 수 없었다. 수업 일수는 어떻게든 채워야 해서 보강 날짜 잡는 것도 일이었다. 그래도 보강은 나은 편이었다. 외근으로 수업을 빼면, 제자들 달래는 것도 둘째치고 봐줘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이번 달만해도, 학교 신입생을 받기 위한 입학시험 홍보 기간이었다. 학생들이 무사히 학교에 올 수 있게 주변을 정리하느냐 정신없었다. 선택권은 없었다. 학교에 온 순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보호하는 게 1순위였다.

 

  “업무는 향아치 선생님 호패에 보냈습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

 

*

 

  학교 밖을 나오면 황폐한 풍경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정비된 도로와 높게 세워진 건물은 이미 망가지고 부서진 지 오래였다. 유리가 깨진 자동차, 상징과 이름을 잃어버린 간판과 표지판. 기능을 상실한 신호등과 가로등이 망령처럼 서 있었다. 학교에 있을 땐 평화로운데, 학교 밖을 보면 그건 꿈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향아치의 호패에서 빛나더니 향아치의 눈높이에 맞춰서 모니터가 띄어졌다. 모니터엔 업무 내용과 지도가 있었다. 업무 내용은 중세국어로 씌어 있었다. 중세국어를 모르는 남궁혁과 앵보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렸지만, 향아치는 이해했다.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오. 해당 장소로 가서 물건만 가져오면 되오.”

 

  “물건이요? 자원은 충분하지 않아요? 뭘 또 가져올 게 있지?”

 

  향아치 말에 앵보가 머리를 긁적였다. 남궁혁도 최근에 신청한 비품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향아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유물 남은 곳 있냐고 교장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교장이 웃으면서 찾아보겠다고 했다. 향아치는 헛기침을 하며 確認(확인)을 눌렀다.

 

  “뭐, 가봐야 알지 않겠소. 우리가 이렇게 떠들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은 가.”

 

  남궁혁과 앵보는 웬일이냐는 눈빛으로 봤다. 평소 같으면 교장을 갈자면서 셋이서 힘을 합치면 못할 것도 없다는 등 말했었다. 둘은 잠시 가만있다 시선을 주고받았다. 남궁혁이 향아치의 뒤로 가더니 그의 팔을 힘껏 붙잡았다. 당황한 향아치가 발버둥을 쳐도 꼼짝할 수 없었다. 남궁혁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대감. 가만히 있게. 가만히.”

 

  “혀, 혁 도령. 왜 그러는 가.”

 

  “어르신. 왜겠어요.”

 

  어느새 앵보가 향아치 앞에 섰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총에 향아치가 기겁했다.

 

  “앵, 앵보 도령. 혁 도령. 왜 그러는 가. 오늘 소관은 아무 짓도 안했네! 먼저 도망치지도 않았어!”

 

  “뭐, 어르신이 도망치는 게 하루 이틀입니까.”

 

  “그치. 자네는 우리보다 위험 감지하는 게 더 뛰어나지 않나.”

 

  “나는 자네들보다 약하지 않나! 툭하면 총이랑 칼로 싸우는 놈들이랑 양반이랑 같은 줄 아는 가!”

 

  “어르신. 어르신도 총 쓰잖아요. 저랑 우리 애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시죠?”

 

  앵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향아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향아치가 들고 있던 총은 레밍턴 롤링블럭이었다. 19세기 미국에서 남북전쟁을 하며 만든 총이었다. 그 당시에 신식 총이었지만, 현재 그 총이 남아있는 자료가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앵보는 총알이 없는 총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총 구조들이 많이 단순했다. 향아치는 실탄을 원해서 기존 것보다 구할 부품도 많았다. 고증에 까다로운 향아치라 원하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그, 그래도 교장이 금 많이 주지 않았는가!”

 

  향아치 말에 앵보는 할 말을 잃었다. 대신 남궁혁이 팔을 꽉 잡고 눌렀다. 향아치가 아프다고 하자, 남궁혁이 놨다. 팔 빠지면 어떡할거냐는 말에 남궁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티격태격 하고 있을 때,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셋은 본능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남궁혁은 사람의 기척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앵보는 잔해들로 대략적 위치를 파악했다. 민간인이 사는 지역도 아니고, 시민군이나 반군이 주둔하는 위치도 아니었다. 앵보는 낮게 욕을 했다.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된 향아치는 총을 꽉 잡았다. 일단 남궁혁과 앵보가 있어 든든했지만, 본인의 몸은 본인이 지킬 줄 알아야 했다.

 

  “살려주세요.”

 

  살려달라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긴장 풀린 향아치가 총을 든 팔을 내려놓으려 하자, 앵보와 남궁혁이 바로 그 팔을 붙잡았다. 의아해하며 향아치가 둘을 번갈아 봤다. 둘의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간 걸 보고 향아치는 의아했다.

 

  “누구 없어요! 제발,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절박한 목소리를 듣고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남궁혁과 앵보는 아주 작은 소리로 향아치를 불렀다.

 

  ‘대감. 속지 말게.’

 

  ‘어르신. 속지 마세요.’

 

  살려달라는 외침이 멎고 이내 흐느꼈다. 어린아이의 흐느끼는 소리에 죄책감이 배가 되었다. 이어 잔해 속에서 앙상한 팔이 튀어나왔다. 여기저기 휘적이며 도움을 요청하는 가녀린 팔은 음식도 제대로 못 먹는 것 같았다. 팔은 먼지와 흙으로 뒤덮였고, 손등은 어디에 찔리고 베였는지 상처와 피 투성이었다. 앙상한 팔 위로 다 낡고 해진 옷도 보였다. 옷도 더럽고, 피 묻은 자국이 있었다. 제일 눈에 걸린 건, 소매가 다 헤져 있었다.

 

  “저 좀, 제발…제발…살고 싶어요…….”

 

  울먹이는 목소리에 강렬한 삶의 의지가 보였다. 누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는 간절함을 더 지켜볼 수 없었다. 향아치가 가려고 하자, 남궁혁이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의 눈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언제나 대명문정파 가문의 사람으로 불의를 못 참는다는 그였다. 평소 사파 같은 행동을 할 때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살려달라니까요. 살려달라고요!”

 

  울먹인 목소리는 이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남궁혁은 천경검을 뽑았다. 앵보는 팔로 향아치 앞을 막았다.

 

  “대감님은 아직 본 적 없으시죠?”

 

  “본 적 없다니? 뭘 말인가.”

 

  남궁혁은 손 바로 옆으로 발을 세게 굴렀다. 콘크리트 파편에 남궁혁의 발자국이 남으며 아주 잘게 부서지며 순식간에 떨어졌다. 아주 괴로운 비명이 들려도 남궁혁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가끔 보게 될 거에요. 지금까지 운 좋아 안 만났을 뿐이에요.”

 

  앵보의 말에 향아치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본질은 선한 둘이 도와달라는 말에 무시하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향아치는 아차 싶었다. 울먹이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변했던 게 떠올랐다. 그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음에 나오는 신경질이었다. 향아치는 설마하는 눈으로 다시 남궁혁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남궁혁은 무너지는 잔해 사이로 사이보그와 눈이 마주쳤다. 사이보그는 남궁혁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잔해 밖으로 꺼낸 앙상한 팔이고, 다른 팔은 근육이 보이는 건장한 팔이었다. 얼굴은 10대 초반이었지만, 점차 20대 후반의 얼굴로 서서히 바뀌었다. 남궁혁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의 살기에도 무너지는 잔해들 사이로 숨어있던 인영이 보였다. 남궁혁은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렸다. 그들은 남궁혁이 보이자 총을 쐈다. 기계들 또한 알고 있었다. 남궁혁이 총알 정도는 가볍게 피한다는 걸. 그래도 환영인사에는 아주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 오늘 운 좋네.”

 

  방금 전까지 살려달라는 아이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익숙한 목소리에 앵보의 동공이 커졌다. 앵보는 헛웃음을 지으며 총알이 있는 권총으로 바꿨다. 향아치는 앵보가 왜 총을 바꾸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건 투플러스 소고기도 아니고. 아주 좋은 수배자들이네.”

 

  흙, 먼지, 상처와 피로 뒤덮인 앙상한 팔은 어느새 건장한 성인의 깨끗한 팔로 바뀌었다. 남궁혁은 여전히 경공으로 그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무수히 떨어진 총알들이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보는 거죠?”

 

  잔해를 밟고 서 있는 사이보그는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소매는 걷어올리고 있었고, 양팔은 상처 없이 깨끗했다. 남궁혁은 말없이 사이보그 밑에 숨어있는 다른 사이보그를 봤다.

 

  얼굴에 있는 무수한 상처, 자신과 똑같은 중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48. 48의 얼굴에 있는 상처는 전부 남궁혁이 낸 거였다. 팔을 잘라내고, 눈까지 멀게 하고, 목까지 베었으나 얼마 안 있어 멀쩡한 상태로 중원에 돌아온 이였다.

 

  세가와 문파의 기술을 보고 따라하는 그저 잡것에 불과했다. 남궁세가의 검술 또한 기계 손에 넘어갔으나 뇌공을 이용한 기술은 베끼지 못했다. 아무리 인간처럼 다치고 생각하고 감정을 느껴봤자 인간이 가진 특별한 능력은 얻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지상을 탈환하지 못한 게 중원이었고, 노력해도 무림 고수도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열등감이 심하며 잔혹했다.

 

  앵보는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이보그에 이를 으드득 갈았다. 마음 같아선 노려보고 싶었지만, 자신의 눈을 꽉 감았고, 손으로 향아치의 눈도 가렸다. 앵보의. 백발은 어느새 붉은색으로 뒤덮였다. 화날 때마다 나타나는 그의 신체적 특징이었다. 향아치는 앵보가 눈을 가리는지 이해할 수 있지만, 일단 잠자코 있었다.

 

  “어르신, 물러나 있어요. 대협! 대협 눈 마주치지 말고 물러나세요!”

 

  남궁혁은 48을 내려다봤다. 48도 남궁혁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 위에서 꼿꼿하게 서 있는 그를 보며 48은 헛웃음이 나왔다. 창천. 푸른 하늘처럼 드넓고 한계가 없음을 보여주는 남궁 세가의 삼공자. 푸른 하늘 밑에서 떳떳하게 있는 그와 다르게 하늘 밑을 숨은 자신이 한심했다. 하늘 밑에 숨어 현신을 노리는 삶. 이게 자신이 원했던 삶이 맞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남궁혁은 48과 그 옆에 있는 기계를 봤다. 기계는 48과 다르게 남궁혁을 보고 있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그저 턱을 괸 채 앉아있었다. 남궁혁은 앵보와 향아치와 둘을 보는 사이보그를 봤다. 이 사이보그도 남궁혁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남궁혁은 다른 것보다 48이 신경 쓰였다. 여전히 살기를 드러내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남궁혁은 주먹을 쥐었다. 아직 남궁혁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앵보는 허공에 다급하게 총을 쐈다.

 

“대협!”

 

  남궁혁은 48을 내려다봤다. 숨어있으면서 틈을 노리는 기계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손 볼려면 지금뿐이었다. 48은 남궁혁 손에 천경검이 없는 걸 확인하자 입꼬리가 비틀렸다. 자신 정도는 검이 없어도 되는 상대에 불과한가. 48이 자리에 일어나려 하자, 옆에 있던 사이보그가 화들짝 놀라며 꽉 붙잡았다.

 

  “남궁혁 선생님. 향아치 선생님. 앵보 선생님.”

 

  앵보와 안면이 있는 사이보그가 입을 열었다. 남궁혁은 일단 앵보가 이르는대로 뒤로 물러났다. 앵보의 경고에도 남궁혁은 사이보그의 눈을 봤다. 남궁혁은 사이보그가 자신의 기억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저들이 검법을 알고, 내공을 알아도 소용 없다는 걸 알기에 내비뒀다.

 

  “눈도 안 마주치는 건 너무하네요. 선생님이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보는건데, 반갑다고 인사는 할 수 있잖아요. 아, 제가 선생님 부하 죽여서 그래요? 그게 언제적일인데 아직도 담아두고 있어요.”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지만, 앵보의 총은 사이보그를 향해 겨누지 않았다. 그걸 본 사이보그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다. 옛날에 영두라고 불러준 거 같았는데 아니었나?”

 

  “내가 부른 거냐. 네 입으로 그렇게 불렀잖아.”

 

  “하지만 제 이름이 02니 어쩔 수 없잖아요. 영둘보다는 영두가 더 귀엽지 않아요? 선생님 부하, 아니 이젠 제자들이라고 불러야 하나? 제자들 호칭이랑 비슷하잖아요.”

 

  “내가 예전부터 너 양심 없는 거 알았지. 우리 애들 따라하며 뒷통수 칠 생각인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선생님. 저만 나쁜 학생인가요? 선생님 쪽도 절 이용해서 정보 캐려고 했잖아요. 누가 먼저 배신해서 이기는 게임이었다고요. 그 게임에서 선생님 팀이 패배했는데 이젠 결과를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어요? 어차피 이 세계는 오래 살아봤자 자연사 못 해요.”

 

  02는 남궁혁을 보고 씩 웃었다.

 

  “중원 빼고요.”

 

  남궁혁은 어이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래 살아봤자 고통뿐인 인생이잖아요. 학교에 들어가봤자 달라지는 게 있나요? 선생님은 여전히 기계들과 싸우고 무기 만들고 있잖아요. 지겹지 않아요. 그 인생이?”

 

  “우리 애들이 있는데 뭐가 지겨워.”

 

  “부럽네요. 난 내 삶이 지겨운데.”

 

   02는 싱긋 웃었다. 향아치는 손 틈 사이로 땅에 꽂힌 천경검이 흔들리는 걸 봤다. 앵보도 땅에서 기척을 느꼈다. 그제야 남궁혁은 왜 기계들이 자신을 상대하지 않았는지 알았다. 48은 연막이었다. 더는 꾸물댈 시간이 없었다.

 

  남궁혁은 재빠르게 경공을 써 땅에 꽂힌 천경검을 뽑아 다시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각각 향아치와 앵보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그들이 있던 땅 위로 입을 크게 벌린 기다랗고 큰 로봇이 하나 튀어나왔다. 지네처럼 여러 발이 달렸으며, 몸통이 길었다. 얼굴에는 눈이 없었고, 큰 입을 계속 벌리고 있었다. 입 주변에는 비릿한 피 냄새와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앵보는 장전 가능한 권총에서 장전 없는 권총으로 바꿨다.

 

  “대감님. 턱 노릴 수 있겠어요?”

 

  앵보가 총구를 잡고 늘리자, 권총이 순식간에 장총으로 바뀌었다. 향아치는 기계를 다시 살폈다. 크게 벌린 입 때문에 턱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철로 만들어진 이빨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있었지만, 크게 벌린 입 덕분에 안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입안에는 혀가 없고, 턱과 입이 연결된 부분은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았다. 턱 대신 노릴 곳이 생겼다.

 

  “문제 없네.”

 

  “제 신호에 맞춰 쏘셔야 됩니다. 먼저 쏘면 큰일 나요.”

 

  “잡아 먹히기라도 하는가?”

 

  “뭐, 궁금하면 쏴도 되는데 추천은 안합니다.”

 

  “응. 잡아 먹히네.”

 

  “뭐하는가. 얼른 신호 주시게.”

 

 “좀 기다려보세요. 쟤는 총으로 한 번에 못 죽여요.”

 

  눈이 없는 지네로봇은 셋이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알았다. 꿈틀거리며 셋이 있는 곳으로 입 벌리고 쫓아왔지만, 남궁혁의 경공을 따라올 수 없었다. 남궁혁은 일부러 내려가며 사이보그들이 있던 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이미 그들은 사라진 뒤였다.

 

  남궁혁은 자신이 발로 무너뜨린 위치를 봤다. 사이보그들이 위장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 보였다. 거기에 먼지와 부스러기에 찍힌 발자국들이 일제히 자신의 뒤쪽으로 향해 있었다. 남궁혁은 한 번 더 땅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바로 뒤쪽으로 가려다 혹시 모라 옆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앵보에게 물었다.

 

  “앵보공. 여기 지리 아는 가.”

 

  남궁혁 말에 앵보는 잠시 눈에서 목표물을 뗐다.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무너진 건물과 도로의 형태와 무너진 잔해의 모양을 보고 여기가 어딘지 금방 파악했다.

 

  “네? 네. 알죠. 물자 조달한 적 있습니다.”

 

  “그럼 내 등쪽으로 양민들이 사는 가?”

 

  “대협 등쪽으로요?”

 

  여기저기 위치가 바뀜에도 앵보와 향아치의 총구 방향은 정확히 목표물을 가리켰다. 향아치는 입안, 앵보는 지네로봇의 입 위에 있는 작은 점이었다. 앵보는 목표물을 노리면서도 머릿속에 넣은 지도를 떠올렸다.

 

  “네. 대협 등을 기준으로 300m에 마을이 있어요. 대협 배 쪽으로 위아래로 이동하면 됩니다.”

 

  “위 아래는 뭔가.”

 

  “알아들으면 됐죠.”

 

  “일부러 그 쪽으로 갔군.”

 

  남궁혁 말에 앵보가 의아하듯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기계 기척 못 느낀다 하지 않았어요?”

 

  “땅에 파인 발자국 위치로 알았네.”

 

  “그거 속임수 아닌가.”

 

  향아치 말에 남궁혁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똑똑한 놈은 아니라서.”

 

  “네? 그놈 똑똑해요.”

 

  “셋이네. 하나는 중원에서 왔고, 다른 하나는 대감이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노렸던 놈.”

 

  “아, 도망친 한 놈이 있었지.”

 

  “어르신 인기 많으시네요.”

 

  “자네도 인기 많지 않은 가. 아까 그 기계랑 안면이 있어 보이던데.”

 

  앵보는 말없이 자신의 하얀 넥타이를 고쳐 맸다.

 

  “어르신. 하나 둘 셋 하면 쏘는 겁니다. 대협!”

 

  “알고 있네!”

 

  남궁혁은 여기저기 방향을 틀면서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향아치와 앵보의 사정거리는 각각 달라 그 중간 지점을 노려야 했다. 이리저리 빠르게 위치가 변함에도 앵보와 향아치는 안정적인 자세로 목표물에 조준했다. 향아치는 남궁혁이 빠르게 멀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흔들림 없이 목표물에 조준했다.

 

  “하나. 둘.”

 

  앵보는 향아치의 사정거리 안으로 지네로봇이 들어온 걸 확인하자, 외쳤다.

 

  “셋!”

 

  둘은 동시에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신기하게도 둘의 총에선 총소리도 나지 않았고,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네로봇의 입안을 정확히 관통하면서 턱까지 구멍이 났고, 작은 점에 정확히 맞췄다. 맞은 자리에 피가 흘러내렸으며, 지네로봇은 괴롭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지네로봇은 추격을 멈추더니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셋은 놓치지 않고 쫓아갔다. 앵보가 향아치에게 말했다.

 

  “어르신. 쉬지 않고 입안 쪽을 쏴요. 어디를 맞추든 상관없어요!”

 

  “알겠네!”

 

  앵보와 향아치는 쉬지 않고 지네로봇의 입안을 향해 총을 쐈다. 지네로봇은 입을 여기저기 흔들며 괴성을 냈다. 입에서 피가 쏟아지는데도 아직도 쓰러지지 않았다. 언제봐도 참 끈질긴 놈이었다. 입안과 그 밑 가죽과 아까 맞춘 카메라 위치를 제외하곤 총알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 지네로봇 때문에 총의 살상력을 높였는데도 소용없었다. 앵보는 혀를 차더니, 남궁혁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눈치를 챈 남궁혁은 향아치를 불렀다.

 

  “대감.”

 

  “엉?”

 

  “검집 좀 내 발등으로 놔주게.”

 

  “어? 어 그러지.”

 

  “총도 집어넣고.”

 

  “총을?”

 

  향아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남궁혁을 봤다. 여기서 떨어뜨리며 기연을 축하하네, 이 말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의심스러운 향아치의 눈과 다르게 남궁혁은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향아치는 총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아직 자신의 허리를 붙잡은 팔에 힘이 풀리지 않았다. 향아치는 남궁혁을 빤히 보며 그의 허리춤에 있는 검집을 발등 위로 놔줬다. 남궁혁은 앵보를 잡은 팔에 살짝 힘을 풀었다. 지네로봇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애원인지, 도와달라는 건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안 된다는 걸 셋은 알고 있었다.

 

  남궁혁은 기계의 위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지네로봇이 괴로워하며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릴 때, 앵보의 허리를 잡은 손을 놨다. 그러자 지네로봇의 비명을 듣고 온 건지, 땅에서 다른 지네로봇 5대가 땅 밖으로 나왔다. 여기저기에 입 벌리는 로봇들의 입에서 피와 침이 뚝뚝 떨어졌다. 아래로 떨어지는 앵보를 서로 잡아먹기 위해 경쟁하는 것처럼 보였다. 밑에 지옥이 기다리고 있지만, 앵보는 여유롭게 씩 웃으며 이마에 걸친 선글라스를 썼다.

 

  앵보가 떨어지자마자 남궁혁은 발등으로 검집을 찼다. 검집을 쥐고 있던 향아치의 손에 심한 충격이 왔다. 손이 파르르 떨리며 힘이 빠져 저절로 검집을 놨다. 너무 아파서 비명 조차 나오지 않았다. 남궁혁은 반동으로 튀어나온 천경검을 잡았다. 떨어지는 검집은 앵보가 잡았다. 그리고 총으로 지네로봇의 작은 카메라를 차례로 명중했다.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앵보 공. 이 쪽으로 오게.

 

  그 순간, 지네로봇 입에서 남궁혁의 목소리가 나왔다. 향아치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분명 남궁혁은 자기 허리를 붙잡고 있는데, 왜 소리가 밑에서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소관이 하는 걸 잘 보게. 총이라는 건 이렇게 쏘는 것이오.

 

  어르신. 자꾸 그러면 지게 태워요.

 

  향아치는 자신의 목소리에 이어 앵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궁혁과 앵보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목소리를 말하면, 기계들이 더 빠르게 학습만 할 뿐이었다.

 

  이제부터 시간문제였다. 이젠 자신들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관련이 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꺼낼 차례였다. 남궁혁은 중원에서 왔고, 향아치는 대한제국에 왔다. 학생들이 지하에 살아도 지금 둘과 같이 있는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 나올 확률은 전무했다. 앵보는 이를 악물었다. 죽은 부하들의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 없애야했다.

 

  남궁혁은 천경검에 기를 모았다. 푸른 기가 검 주위에 맴돌더니 이내 전기가 생겼다. 앵보는 제일 먼저 나타난 지네로봇 입 위로 떨어졌다. 지네로봇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을 때, 앵보는 입 사이에 검집을 집어넣었다. 지네로봇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지만, 완전히 닫지 못했다. 입 사이에 있는 검집이 그걸 막았다. 앵보는 그 위에 사뿐히 앉았다.

 

  “역시 명검은 검집도 다르네.”

 

  앵보는 웃으며 총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쪽으로 돌렸다. 총 손잡이가 그대로 일자가 되더니 파이프 형태가 되었다. 쇠파이프에 여기저기 긁힌 자국과 피가 묻어 있었다. 앵보는 총으로 카메라를 맞춘 곳에 파이프를 집어넣었다. 괴로움에 다시 몸을 흔들었지만, 파이프를 꽉 잡은 덕에 떨어지지 않았다. 앵보는 주머니를 뒤적여 라이터를 꺼냈다. 몸 자체는 총이나 칼을 이용해 죽이기 힘들었지만, 몸은 불이 잘 붙었다. 하지만 지하에는 연기 때문에 할 수 없어 언제나 지상으로 유인해 공격했다.

 

  다행히 주머니에서 라이터 두 개가 나왔다. 나중에 몰래 담배를 필 때 쓸 라이터 하나는 남았다. 앵보는 라이터를 켠 채 그대로 지네 로봇 입안에 떨어뜨렸다.

 

  “대감. 조금 따끔할 거네.”

 

  남궁혁의 천경검에 푸른 전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향아치는 남궁혁의 뇌공을 보고 기겁했다.

 

  “혁, 혁 도령! 나는 자네처럼 내공이 없네! 소관 타 죽네!”

 

  “걱정말게. 자네 옷에 방전 기능 있지 않나. 내가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는 한 타죽지 않을 걸세.”

 

  “아까 손 저린 거 보지 않았나! 뇌공까지 하면 진짜로 큰일나네!”

 

  “하하, 걱정말게. 오히려 저린데에 전기가 통하면 개운한 법이지.”

 

  “아직 오동나무 관에 들어가기 싫단 말이오!”

 

  향아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남궁혁은 호탕하게 웃었다. 사특한 것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올라오려고 했다. 감히 하늘을 향해 도전하려는 것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평온한 하늘에 벼락과 함께 용이 내려왔다. 용은 매섭게 간악한 자들을 향해 돌진했다. 아무리 총과 칼로 뚫지 못할 정도로 단단해도 용의 발톱 아래에선 소용없었다. 징벌을 끝낸 용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하늘로 돌아갔다.

 

  향아치의 얼굴이 헬쓱해졌다. 남궁혁은 웃으며 향아치에게 말했다.

 

  “어떤가, 대감! 저린 게 나아지지 않았나.”

 

  “말 걸지 마시게. 소관 방금 저승사자와 인사 나누고 왔소.”

 

  “아예 통성명까지 하지 그러나.”

 

  향아치는 손으로 이마를 쳤다. 탁, 소리가 나자 남궁혁은 하하 웃었다.

 

  “의원한테 침 맞았다고 생각하게.”

 

  “전기랑 침이 같은 줄 아는가!”

 

  “대협! 어르신!”

 

  “아, 맞다.”

 

  떨어지는 앵보 옆으로 지네로봇이 불타고 있었고, 앵보의 양손에 파이프와 검집이 들려 있었다. 남궁혁은 여전히 향아치를 허리에 매단 채 앵보에게 날아가 쉽게 받았다. 지네로봇에 붙은 불은 땅에 쓰러진 다른 지네로봇들에게 한순간에 붙었다. 안전한 곳으로 가도 로봇 6대가 불타는 게 한눈에 보였다.

 

  “이야, 잘 타는구만.”

 

  남궁혁이 감탄하며 바라봤고, 향아치는 물 마시며 숨 돌렸다. 앵보는 무기 상태를 확인했다. 어느정도 휴식을 취한 셋은 다시 호패에 나온 지도를 봤다. 화살표는 반대 방향이 아닌 앞 쪽을 가리켰다.

 

  “다행히 맞게 가고 있구려.”

 

  남궁혁은 호패에 있는 지도와 화살표를 물끄러미 보다 기계들이 도망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앵보 공. 아까 그 사이보그들이 걸려서 말이야. 발자국 방향을 봤는데 양민들이 있는 곳으로 갔거든. 일단 양민들로부터 그 식인기계들을 떨어뜨려야 해서 일부러 정반대로 방향을 틀었지만, 괜찮은가.”

 

  “아, 거기에 시민군들이 주둔…….”

 

  앵보는 말을 멈췄다. 02는 전투에 특화된 사이보그가 아니었다. 외형상 사람인지 로봇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점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기계와 100년 가까이 싸우고 있다 해도 아직도 기계와 사람을 구별하는 기술은 나오지 않았다. 02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인 척 마을에 파고들었다. 민간인 사이에 숨어있다가 시민군들 일부가 다른 곳 지원이나 물자 받으러 갈 때를 노렸다. 슬프게도, 시민군과 마을끼리는 이런 정보를 몰랐다. 마을 하나가 없어지거나 희생자 수가 급증하는 이유도 기계에 의한 것이니 누구 하나 궁금증을 가지지 않았다.

 

  기계들이 어디를 괴멸 시키고, 세력이 줄고 늘었는지에만 집중하다 보니 놓쳐버렸다. 02가 그런 특징이 있는 걸 빨리 알았다면, 그리 한꺼번에 많은 부하는 물론 사람을 잃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형님…진짜 미안한데 다섯 번만, 다섯 번만 봐줘요…….

 

  숨이 붙어 있던 부하가 죽기 전에 했던 부탁이었다. 앵보는 넥타이로 눈을 가린 부하의 손을 부여잡은 채 하염없이 울었다. 알았으니까, 뭐든 다 들어줄 테니 제발 살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부하는 그 말을 끝으로 절명했다. 흰 와이셔츠와 더불어 따뜻한 마음을 품고 모였던 공간은 붉은색으로 가득했다. 앵보의 머리는 붉은색으로 변했으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살아있는 부하들이 겨우 앵보를 진정시켰다. 부하와의 이별은 힘들었지만, 이번 이별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향아치와 남궁혁은 앵보의 머리카락이 붉은색으로 변하는 걸 봤다. 부하를 죽인 악연이 엮였으니 큰 스트레스가 온 게 잘 보였다. 향아치는 앵보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툭 쳤다. 그리고 남궁혁과 앵보를 보고 입을 열었다.

 

  “소관은 이제부터 암행어사고, 자네들은 역졸일세.”

 

  “네?”

 

  “아?”

 

  “별 거 없네. 자네들은 그냥 암행어사 출두야만 외치면 되네. 그럼 소관이 다 알아서 하겠네.”

 

*

 

  02와 91은 흙벽 뒤에 숨어있었다. 48은 홀로 시민군들이 모인 진지에 검은 허리에 꽂아둔 채 걸어갔다. 시민군들은 48을 보고 일제히 총을 쐈지만, 48은 가볍게 피했다. 48의 카메라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각 시민군을 보면, 인공지능이 다음에 할 행동들을 예측했다. 48은 그 예측들을 보며 총을 피하며 시민군의 공격도 손쉽게 막아냈다. 행동을 보니 반격할 타이밍도 잡는 것도 수월했다. 48이 팔다리를 꺾고 부러뜨리는 걸 보면서 02와 91은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시민군 몇 명이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종을 울리려고 했지만, 지켜보던 02와 91에 의해 저지당했다.

 

  “생각보다 늦네.”

 

  02의 말에 91이 웃었다.

 

  “아니,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지. 과거인을 딱 없애려고 할 때 바로 왔거든. 나는 둘이 그리 강하다는 걸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 강할 줄 몰랐잖아.”

 

  91이 손으로 목을 그으며 말했다. 그 말에 02가 91을 한심하듯 바라봤다.

 

  “그러게. 네가 향아치 선생님을 없앴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냐. 궁혁 선생님이랑 앵보 선생님이랑 수배 등급 높아지는데 걸린 시간이 3달 걸렸어. 네가 처음부터 도망치지 않고, 잘 처리했으면 우리가 이렇게 골치 아파지지 않았을거라고! 우리가 신경 쓸 인간이 너 때문에 늘었다고!”

 

  “뭘 그렇게 화를 내? 너랑 나랑 똑같이 실패했잖아.”

 

  “왜 나를 너랑 똑같은 사람 취급해?”

 

  “네가 아무리 무기 상인 부하 흉내 내며 여기저기 쑥대밭을 만들고 다녀도 아무도 믿지 않잖아. 무기 상인은 반군이랑 시민군 사이에서도 배신자라고 떠드는데. 너는? 너는 인간인 척 숨어 들어가 마을 몇백 개 날려 먹어도 아는 사람 없잖아. 아, 그나마 아는 애들이 학교에 들어갔지? 어떡하냐.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91의 말에 02의 표정이 아까보다 굳었다. 91은 웃으며 02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얼굴 풀어. 인간들이 우리에 대해 뭘 아니. 우리가 얼마나 많은지, 로봇마다 어떤 재능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잖아. 너희는 선생들에게 악당이라 알고 있지, 나는 그냥 도망친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잖아.”

 

  91은 씩 웃으며 흙벽을 따라 쭉 있는 길을 향해 걸었다.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등이 있어 그리 어둡지 않았다. 91은 뒤로 걸으며 02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또 도망가게 시간 좀 벌어줘, 친구.”

 

  02가 무슨 말이냐고 묻기 전에 저 너머로 엔진음이 들렸다. 엔진음보다 더 빠른 존재는 순식간에 48의 등을 오른손으로, 왼손은 천경검으로 48의 오른손등을 찔러 넣었다.

 

  “암행어사 출두야!”

 

 셋 중에서 향아치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앵보와 향아치는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는데 향아치가 운전하고, 앵보가 그 뒤에 타고 있었다.

 

  “어르신. 브레이크 위치 기억하죠?”

 

  “걱정말게. 도령에게 확실히 배웠으니 문제 없소.”

 

  “어르신. 이거 어르신이 세운 계획입니다. 잘못되도 저희 책임 아니에요.”

 

  “아니, 우리 같은 팀 아닌가! 당연히 문제가 있으면 공동 책임이지!”

 

  “이럴 때면 팀이래!”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오토바이가 02 앞에 멈췄다. 02가 이게 뭔 상황인지 싶어 오토바이에 탄 향아치와 앵보를 바라봤다. 앵보가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암행어사 출두야!”

 

  향아치는 큰 소리로 외치며 91이 간 방향으로 오토바이를 운전했다. 02는 어이없다는 듯 앵보를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앵보는 머플러로 눈을 가렸다.

 

  “뭐야, 이 긴장감 없는 등장은?”

 

  02가 비웃어도 앵보는 웃으며 권총을 장전했다. 탄창이 필요한 권총은 앵보가 잘 쓰지 않지만,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총이었다. 민간인에게 해가 간다는 판단이 들면 쓰는 무기였다. 봐준다는 말이 정말 진심일지 몰랐다. 앵보가 넥타이를 두드리자, 귀에 이어폰이 생겼다. 흰이어폰 상단에 앵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02의 조롱에도 앵보는 입에 담배를 물었다. 머플러로 눈을 가렸어도 어디에 라이터와 담배가 있는지 알았다. 여기서 앵보가 신경 쓸 건 담배 냄새를 맡는 것도 싫어하는 남궁혁이었다. 아직 별말 없는 걸 보니 냄새가 거기까지 안 간 모양이었다. 앵보의 머리카락은 서서히 붉은  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때처럼 이성 잃은 사람처럼 02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앵보는 왼손을 주먹 쥔 채 들었다. 그리고 중지만 까닥거렸다. 중지에 낀 반지 때문에 그의 손가락 움직임이 더 잘 보였다.

 

 

  “덤벼. 지금부터 딱 5번만 봐줄 테니까.”

 

  48은 자신의 등을 누른 존재가 누군지 알았다. 시민군들은 푸른 장발의 사내가 순식간에 제압하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푸른 장발에 중원 복장을 하고, 칼에는 용의 장식이 되어 있고,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잘생긴 남자를 보고 중원에 온 선생이라는 걸 알았다. 이름이 남궁혁이지만, 사람들에겐 궁혁이로 친숙한 그였다. 같은 편이라는 걸 인지한 시민군들은 부상자들을 데리고 대피했고, 아직 전투 가능한 인원은 남궁혁을 보조하기 위해 일제히 총을 들었다.

 

  48은 남궁혁의 등장이 반가웠다. 지금 눈이 땅바닥으로 향해 있어 남궁혁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어도 즐거웠다. 48은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시민군들을 바라봤다. 48은 웃으면서 아직 자유로운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48의 오른손은 남궁혁이 천경검으로 찔러 넣었다.

 

  카메라가 지금 남궁혁의 행동을 예측 못하지만, 48은 남궁혁이 지금 뇌공 쓰려는 걸 잘 알았다. 땅이라는 지형 때문에 전기는 잘 통하지 않겠지만, 상대는 남궁혁이었다. 그에게 많이 졌고, 죽었기에 몇 수는 아주 잘 알았다. 많은 사람이 둘러싸고 있어서 자신을 기절시킬 정도의 뇌공을 쓸 게 뻔했다. 하지만 남궁혁이 간과한 게 있었다. 48은 중원에서 악명이 높았던 마교주였다.

 

  “여전히 자네 실력은 녹슬지 않았구려. 가주님은 잘 계시는가.”

 

  그 말을 하고 48은 입안에 숨긴 캡술을 힘껏 깨물었다. 순식간에 48 주위로 독 구름이 피어났다. 점점 퍼져나가자, 남궁혁은 재빠르게 숨을 참았다.

 

  주로 시민군이 주둔하는 기지 바닥은 텅 비어있습니다. 막 중요한 건 아니에요. 대부분 비어있는데 비상시에는 일부러 적들을 떨어뜨리기 위한 함정으로 쓰기도 해요. 그렇다고 밑에 특별한 장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올라오기 힘들죠.

 

  남궁혁은 앵보에게 들었던 내용을 떠오르며 주먹과 다리에 내공을 주고 힘껏 흙바닥 때렸다. 바닥에 균열이 일어나며 순식간에 48과 함께 남궁혁이 밑으로 떨어졌다. 여전히 연기는 퍼져나갔고, 앞의 시야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연기 사이로 독침이 나왔지만, 남궁혁은 가볍게 피했다. 여전히 48의 손등에 천경검이 박혀있었다. 48은 왼손 소매에 숨겨둔 칼로 남궁혁의 얼굴을 찔렀지만, 남궁혁은 그것도 손쉽게 피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데도 남궁혁은 여전히 48을 놔주지 않았다. 경공으로 속도를 낮추거나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몸에 힘을 줘 낙하 속도를 빠르게 했다.

 

  바닥에 쿵 소리가 났고, 먼지가 자욱했다. 남궁혁의 발밑에 48이 깔려 있었다. 48의 몸에는 피가 흘러나왔다. 남궁혁은 우선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위에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시민군의 얼굴이 작게 보였다. 일단 저들의 안전을 확보했으니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다. 남궁혁의 발 밑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남궁혁은 징그럽다는 듯 48을 내려다봤다.

 

  “중원에서 온 보람이 있네. 자네가 이리 환대해주고.”

 

  48은 웃었다. 그는 남궁혁이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벨 거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남궁혁도 잘 알았다. 48의 몸에 있는 상처 대부분은 남궁혁이 낸 거였다. 48의 팔다리가 날아가고, 눈까지 멀고, 목까지 베었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거와 달리 48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되돌아왔다.

 

  “자네가 없는 중원은 심심해서 말이야. 그래서 좀 장난을 쳐봤지.”

 

  48의 손은 아직 자유로운 왼손에 독침을 꺼냈다. 남궁혁은 독침을 보고 이를 빠드득 갈았다. 48의 독침은 사람의 신체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었다. 기절하고 쓰러진 사람들도 저 침만 맞으면 일어났다. 문제는 이성을 잃고 48의 명령을 들으며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다. 문제는 살아있는 사람이 점점 썩어가며 죽어갔다. 강시나 좀비처럼 시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체가 될 때까지 싸워야만 했다.

 

  “세가에, 안휘에 손을 쓴 거냐.”

 

  살기가 넘치는 남궁혁 말에 48은 웃으며 손에 있는 독침을 자유롭게 움직였다. 48이 대답하지 않자, 남궁혁은 천경검을 세게 눌렀다. 48은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천경검에 박힌 손등을 스윽 위로 올렸다. 남궁혁이 뭔지 알기도 전에 그의 손목이 떨어졌다.

 

  “자네에게 목 하나 내줬는데, 손목 하나 못 줄까.”

 

  48은 웃으며 남궁혁의 얼굴 쪽으로 왼손에 숨겨둔 검을 찔러넣었다. 남궁혁은 가볍게 피했다. 이번엔 48은 아주 구멍을 향해 높게 침을 던졌다. 순식간에 구멍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침을 남궁혁이 경공술로 올라가 잡았다. 그 틈에 48은 천경검에 박힌 자신의 오른손등을 뺐다. 그 손등을 다시 주워 조립했다. 48의 움직임에 따라 손은 아주 잘 움직였으며, 벌어진 손등에 피가 났다.

 

  남궁혁은 독침에 내공을 불어넣은 채 48에게 달려들었다. 48은 천경검으로 남궁혁의 공격을 막았다. 겉으로 보기엔 남궁혁이 무기에 밀려 보였다. 천경검은 명검이었고, 48의 독침에 본인을 내공을 불어넣으며 싸우니 손실은 남궁혁이 불리한 상황은 맞았다. 하지만 그는 초절정급 고수였다. 이것보다 악한 상황에서 싸웠고, 강호에 명성을 쌓아 올린 자였다. 남궁혁 본인도 48도 그걸 잘 알았다.

 

  향아치는 여전히 오토바이를 타며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와중에 호패는 녹색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향아치는 손잡이에 손가락을 두드리고 운전했다. 그게 동네 산책하듯 운전하는 것 같아 91은 어이없었다.

 

  02는 앵보의 전투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머플러로 눈을 가리고 있으나 앵보는 02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일부러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도 곧바로 총을 쏴 다음 공격을 봉쇄했다. 총소리와 함께 총은 02를 빗나갔다. 02는 일부러 앵보가 봐준 건지, 눈을 가려 잘못 쐈는지 알 수 없었다. 앵보는 일어나며 02의 턱을 가격했다. 빈틈이 생겼지만, 앵보는 결정타를 날리지 않았다. 낮게 ‘한 번’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02는 위로 날아가며 앵보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순간 팔이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턱 공격의 충격인가 싶어 02는 총을 양손으로 잡았다. 총이 발사된 순간, 앵보의 흰 넥타이에 있는 붉은 눈이 빛났다.

 

  91은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오는 향아치를 보고 한숨 쉬었다.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긴 91은 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향아치는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고, 91은 오토바이 바퀴에 총을 쐈다. 바퀴에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났지만, 향아치는 다치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보고 싶어서 나에게 온 거야?”

 

  “내가 모신 폐하가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이냐.”

 

  향아치는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총이 들려 있었다. 91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거인. 지금 총 든 거야?”

 

  “그럼 이게 낫이나 호미로 보이오? 이게 이래보여도 우리 세대에는 신식 무기요.”

 

  향아치의 무기에 91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혁과 앵보의 경우 공격할 때 어떤 무기를 썼는지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향아치의 공격은 남지 않았다. 가끔 심장 역할하는 초전도체가 없어졌다. 그게 단순히 부품을 챙기기 위함인지 본인의 공격을 감추기 위함인지 알 수 없었다.

 

  91은 가만히 향아치 팔을 봤다. 관복 사이로 보이는 팔은 운동하는 거로 보이지 않았다. 근육 하나 없는 팔로 어떻게 남궁혁과 앵보와 동일 선상에 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향아치의 호패에 적힌 이름이 녹색 빛으로 반짝였다. 91은 향아치의 호패 변화를 보고 견제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91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향아치에게 한 발 다가가자, 향아치는 두 발 물러섰다.

 

  91이 두 발 걷자, 향아치는 네 발 물러섰다.

 

  “어허. 가만히 있게. 그래야 편히 갈 수 있소.”

 

  91은 대체 이 자가 어떻게 높은 등급의 수배자가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남궁혁은 독침 2개로 48의 공격을 막았다. 48은 단순히 칼만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검술이 나타났다. 남궁혁 본인뿐만 아니라 소가주인 큰형님과 가주인 아버지의 특징까지 나왔다. 남궁혁은 48이랑 싸우는 게 아니라 본인과 큰형님, 아버지와 겨루는 느낌이 들었다. 공격에 실리는 힘과 공격의 특징과 버릇들까지 똑같았다. 붙을 때마다 남궁의 검술이 대단하다는 걸 깨달았다. 48은 묵직하게 천경검으로 내리치자, 남궁혁은 독침 2개로 막았다. 힘으로 무너뜨리려는 자와 버티는 자가 팽팽하게 싸웠다.

 

  겨우 가느다란 독침 2개로 맞서는데도 남궁혁의 몸은 무너지지 않았다. 48이 더 큰 힘으로 눌러도 남궁혁은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웃으면서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남궁혁은 독침에 내공을 더 불어넣었다. 독침에 푸른 기가 생기더니 이내 전기로 뒤덮였다.

 

  남궁혁의 뇌공에 48의 얼굴은 일그러지며 이내 증오에 가득 찼다. 인공지능이 남궁혁의 다음 행동을 예측했지만, 48의 눈에는 그게 들어오지 않았다. 48은 남궁혁의 허벅지를 발로 찼다. 그 반동으로 뛰어오른 48은 뛰어올랐다. 남궁혁은 근육이 파열된 걸 느꼈지만,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48의 다음 수를 읽었다. 48의 인공지능이 남궁혁의 다음 행동을 예측했지만, 48은 그걸 자세히 보지 않았다. 48이 남궁혁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남궁혁은 독침 하나로 검을 막고, 다른 독침으로 48의 목에 난 흉터에 빠르게 꽂아 넣었다. 48의 입이 뒤틀리며 남궁혁을 노려봤다. 검을 막은 독침의 뇌공이 천경검을 타고 흐르자, 공명하듯 검에 적힌 천경검(天驚劍)이 푸른 빛으로 반짝였다.

 

  48은 순간 천경검을 통해 남궁혁의 비급을 봤다. 그 내용을 자세히 알기도 전에, 뇌공 때문에 몸 안에 있는 전기 신호가 교란을 일으켰다.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의 틈을 노렸다. 남궁혁은 48의 손목을 꺾으며 검을 뺏은 뒤 남은 독침으로 그의 어깨에 찔러 넣었다. 전기 신호의 교란으로 안이 뒤틀렸다. 48이 기침을 하자, 피가 나왔다. 48은 웃으며 자신의 어깨와 목에 박힌 독침을 뺐다. 남궁혁은 48의 독침 맞은 부위를 자세히 봤다. 역시 사람들과 다르게 48의 몸은 검게 변하는 부분이 없었다.

 

  남궁혁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고쳐주고 강한 무인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말로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었다. 악인이 푸른 하늘 밑에서 살아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남궁 세가, 푸른 하늘처럼 드넓고 끝없는 무공을 가진 협객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48은 손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래, 저 눈이었다. 자신이 여러 번 살아 돌아와도 남궁혁은 변함없는 눈으로 본인을 상대했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망설임이 없었다. 변함없는 사내였다. 48은 웃으며 왼손에 숨겨둔 검을 꺼냈다. 천경검은 푸른 빛으로 깜박이더니 갑자기 창 하나가 떴다. 남궁혁은 미소 지으며 자세를 잡았다. 이젠 봐줄 필요도 없었다.

 

  앵보 앞에도 창이 떴지만, 눈을 가려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익숙한 알람음이라 앵보는 총구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뭔지 02와 48에게도 잘 보였다.

 

  남궁혁 선생님, 향아치 선생님, 앵보 선생님의 뮤즈 동기화가 완료 됐습니다.

  세 뮤즈의 거리 측정 완료.

  200km는 향아치님의 관할 구역이 됐습니다.

  수탈 권리와 규칙은 전적으로 향아치님에게 있습니다.

  뮤즈를 착용한 선생님들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나 향아치님이 수락해야 가능합니다.

 

  91은 향아치의 호패에 녹색 빛이 뜬 걸 봤다. 91은 창에 뜬 마지막 문구를 보고 비웃었다.

 

  “대단한 방법으로 석 달 만에 높은 수배 등급에 오른 줄 알았는데, 이런 눈속임이었어?”

 

  91의 말에도 향아치는 말하지 않았다. 총을 겨눈 채 91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소관을 의심하는 것이오? 이래 봐도 소관은 3세대 탐관오리오. 아주 기가 막히게 단물을 빨아먹는 법을 알지.”

 

  향아치 말에 91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수탈? 무슨 수로? 여기에 과거인 식솔이 없어. 제자들도, 무림인과 무기 상인도 없는데 무슨 수로? 여기에 온 지 석 달 만에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면서 그런 눈속임을 썼어?”

 

  “여기에 있는 건 전부 다 주인 없는 땅 아니오. 미리 주인이라고 말해야 나중에 소관이 떼돈 벌지 않겠소.”

 

  “그때까지 못 살 텐데.”

 

  “시간 왜곡이라 괜찮소.”

 

  91은 웃으며 향아치에게 다가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물러났던 그가 이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심지어 어디 한 번 오라는 듯 거만하게 선 자세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91은 기분 탓이라 생각했다. 자신과 키가 비슷했고, 아무것도 없는 자의 그저 객기로만 여겼다.

 

  91은 향아치에게 걸어가도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았다.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다리가 무거웠다. 향아치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 어디 한 번 오라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91은 이를 갈며 걷다가 이내 자리에 넘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걷지 못하겠으면 기어서라도 오게. 어찌 소관이 거기까지 걸음 하겠는가.”

 

  향아치 말에 91은 부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서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땅을 짚고 일어서던 91의 눈에 아주 긴 면포가 그의 발목에 묶여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면포 사이에 쌀가마니가 묶여 있었다.

 

  “이, 이게 뭐야.”

 

  91의 당황한 목소리 사이로 향아치는 소리 내서 웃었다.

 

  “말하지 않았나. 여긴 소관 관할이라고. 그럼 소관에게 세금을 내는 게 당연한 게 아니겠소.”

 

  “뭔 소리야! 나는 여기 살지도 않아! 당신과 시대도 다르고, 종족도 다른 데 무슨 세금이야!”

 

  91의 외침에 향아치는 피식 웃었다. 손가락으로 딱 하자, 모니터에 아까 나왔던 문구가 다시 재생했다.

 

  남궁혁 선생님, 향아치 선생님, 앵보 선생님의 뮤즈 동기화가 완료 됐습니다.

  세 뮤즈의 거리 측정 완료.

  200km는 향아치님의 관할 구역이 됐습니다.

  수탈 권리와 규칙은 전적으로 향아치님에게 있습니다.

  뮤즈를 착용한 선생님들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나 향아치님이 수락해야 가능합니다.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여긴 소관 관할 구역이라고. 새로운 수령이 왔으니 그에 맞는 세금을 내야 하지 않겠나. 아니면 자네가 나에게 자그마한 성의를 보여주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91은 총으로 면포를 쐈으나 소용 없었다. 오히려 총은 91의 발목을 맞췄다. 91의 발목에는 피가 났다. 면포가 피로 물들었으나 향아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포기하게. 벗어날 방법은 자네의 성의 뿐이네. 자네는 날 기쁘게 하기 위해 뭘 바칠 건가.”

 

  향아치의 말에 91은 부들부들 떨었다. 도주할 수 있는 방법은 여기서 멀어지는 것 뿐이었다. 아까 분명 200km라 했으니 200km 범위를 벗어나기만 하는 일이었다. 향아치는 91의 렌즈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봤다. 향아치는 웃으면서 91에게 한 걸음 다가가자 91이 두 걸음 물러났다.

 

  “도망칠 생각 하지 말게.”

 

  향아치가 손가락을 탁 치자, 91이 본 도주 루트 한 곳이 폭발했다. 91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겁에 질린 91과 다르게 향아치는 웃으면서 바라봤다.

 

  “아까 소관이 운전하면서 손가락 두드리는 거 못 봤나. 소관이 하나하나 설치한 폭탄일세. 이해해주게. 자네처럼 소관의 구역에 들어왔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도망치는 자들이 많아서. 높으신 분이 알기 전에 소관의 선에 처리하는거니 이해해주게.”

 

  91은 웃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구멍 난 발목에는 여전히 피가 났다.

 

  “과거인치고 머리 썼네. 가상현실을 이용할 줄 몰랐어. 엄청 현실적이네. 드럽게 아프고 무거워. 우리가 인간처럼 사고하는 걸 파고들 줄이야. 학교 선생들은 우리 같은 사이보그들을 잘 안 만나서 모를 줄 알았는데. 무림인이랑 무기 상인은 다르지.”

 

  91은 질질 끌던 다리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향아치는 한숨 쉬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래서 미개한 놈들은 말해줘도 모른다니까.”

 

  91의 발이 바닥에 닿자, 소리와 함께 폭탄이 터졌다. 터진 폭탄에도 91의 신체가 멀쩡해서 향아치는 감탄했다.

 

  “이야, 내구성 좋구려. 그거 맞으면 온 몸이 능지처참하는 것처럼 날라가는데. 괴력난신들은 확실히 다르구만.”

 

  향아치의 감탄했고. 91은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폭탄 화력이 낮아 사람이 밟으면 그냥 놀라는 정도였다. 하지만 부상으로 몸에 구멍이 뚫린 기계가 밟는다면 말이 달랐다. 그 안으로 화약 가루가 들어오며 안이 순식간에 타는 폭탄이었다.

 

  손바닥으로 입을 가려도 피가 계속 나왔다. 발목이 부러지며 91은 그대로 향아치 앞에 무릎 꿇었다. 석 달 전에 살려달라 외쳤던 사내를, 이젠 자신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위치가 됐다.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겨우 도망쳤던 사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당당히 서 있었다. 91은 웃으며 바닥에 있는 흙을 긁었다. 빌어먹게도 피가 묻었다.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91은 그저 웃었다. 여전히 그의 발목은 면포와 쌀가마니가 붙잡고 있었다.

 

  “자네 친우들까지 포함하면 얼마나 물어야 하나. 전에 죽은 친우랑 이번에 같이 온 친우들이랑…아, 그 기다란 지렁이는 빼주겠네.”

 

  91은 향아치를 올려다봤다. 겁에 질린 사내가 악독해질 수 있었고, 지킬 게 많아 사악해질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하는 세계가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 향아치가 지킬 건 없었다. 91은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인이 살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제국, 백성, 황제, 가족과 형제, 친구도 없었다. 아, 91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학교. 학교가 있었다. 학교에 향아치의 제자들이 있었다. 어디를 가도 따라갈 그의 제자들이 있었다. 인연이라는 건 참 신기했다. 인연은 하나의 선택이 되고, 그 선택은 결과가 되었다. 향아치가 처음에 온 날 자신은 도망을 선택했고, 그가 인연을 쌓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이 웃음이 많을 줄은 그리 몰랐다.

 

  “지금까지 세금을 낸 자들이 있던가.”

 

  91의 말에 향아치는 탄식했다.

 

  “없네. 그래서 자네가 다 물어줘야 하네. 소관의 관할 구역이 많은데, 세금을 낼 자가 한 명도 없소. 자네, 돈 좀 있는가. 꼭 돈일 필요가 없네. 면포, 곡식이든 뭐든 되니. 그저 나에게 작은 성의만 보여주면 되네.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91은 어이가 없었다. 몸을 바꿔 끼우지 않은 한, 소용없는 일이었다. 프로그램들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91은 웃으며 고개를 들고 향아치를 올려다봤다. 향아치는 아까 그 위치에서 91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발악으로 91은 외쳤다.

 

  “과거인, 부디 과거로 돌아가길 바라네! 과거로 돌아가서 우리로부터 반드시 제국을 지키게! 그렇지 않으면, 다시 여기로 불러오지 않겠나.”

 

  91의 말에 향아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했던 무수한 말중 하나라 상처 입지도 않았다. 그저 똑같은 말을 하는 게 기계라 그런 것 같았다. 91은 미동도 없는 향아치를 보고도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은 흡사 악귀 같았다. 무슨 짓을 해도 홀리지 않아 미쳐버린 악귀가 앉아있었다. 향아치는 총 대신 사인검을 들었다. 사인검을 91에게 던졌다. 91은 그 검을 보고 왜 향아치가 상대한 자들이 어떤 흔적도 남지 않은 걸 알았다. 수치스럽게 그의 무기로 목숨을 끊으니 스스로 프로그램을 종료 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91의 눈가는 어느새 벌개졌다. 사람처럼 충혈된 눈으로 향아치를 노려보며 말했다.

 

  “부디 자네가 있던 시간보다 더 먼 과거로 돌아가게! 그래야 자네를 아무도 믿지 못할 거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지 않겠나. 자네의 운명은 과거와 미래에서 반복된 채 무한한 삶을 살 거네! 궁금하구려. 나는 몇 번이나 자네 손에 손에 죽고, 똑같은 말을 할지 다시 만나면 꼭 알려주게.”

 

  91의 코와 입, 귀에서 무수히 많은 피가 나오더니 이내 쓰러졌다. 향아치는 땅에 떨어진 사인검을 주웠다. 호패가 프로그램 종료된 91을 살폈다.

 

  머리에 있는 백업 데이터도 함께 소실됐습니다. 관할 구역 임기를 연장하시겠습니까?

 

  향아치는 한숨을 쉬며 타이어에 구멍 난 오토바이 위에 앉았다. 양반이 된 자가 함부로 바닥에 앉을 수 없었다. 향아치는 오토바이 위에 앉자마자 임기 연장을 했다. 오늘따라 남궁혁과 앵보가 늦었다.

 

  앵보는 흘러내리는 이어폰을 손으로 꾹 눌렀다. 02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앵보를 봤다. 대체 누가 알려주는지 이어폰을 통해 앵보는 02의 공격을 피했다. 피할 뿐만 아니라 급소가 아닌 부분도 정확히 노렸다. 단순히 전투 능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조력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어폰에는 모스부호처럼 정기적인 박자 신호가 들어왔다. 앵보는 입으로 중얼거리며 박자를 딱딱 맞췄다. 발로 까닥거리며, 앵보는 비살상용 총을 든 채 살상용 총을 꺼냈다. 02는 살상용 총을 꺼낸 앵보를 보며 씩 웃었다. 그가 봐준 게 이번이 4번째였다. 숫자를 잘못 센 건지 아니면 5번 봐줄 생각이 애초에 없을 수 있었다. 02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앵보를 믿는다는 그의 부하들을 비웃었다. 부하들의 약속을 지킨다는 그가 벌써 살상용 무기를 꺼낼 이유는 없었다. 02는 웃으며 앵보의 공격을 예측했다.

 

  앵보는 각 손가락에 방아쇠를 넣고 돌리며 02에게 돌진했다. 프로그램 예측 속도보다 앵보가 더 빨랐다. 앵보는 02의 어깨를 비살상용 총구로 누르고, 살상용 총은 아래로 내리쳤다. 총구가 저절로 길어지는 걸 보고 02는 욕을 지껄였다. 봐준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02는 앵보가 살상용 총으로 자신을 내리치기 전에, 허벅지로 앵보의 배를 찍었다. 앵보의 자세가 휘청이자, 개머리판으로 그의 이마를 내리쳤다. 앵보의 이마가 찢어지자, 넥타이가 반짝이며 순식간에 치료했다. 02는 일단 앵보와 거리를 벌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자신의 어깨에 구멍이 날 뻔했다. 02는 숨을 몰아쉬다 자신의 다리가 뻐근한 걸 느꼈다. 앵보의 배를 내렸던 허벅지가 얼얼했다. 아무리 사람을 때리고 공격해도 멀쩡했던 다리였다. 그 다리가 갑자기 근육통이라도 걸린 것처럼 뻐근한 게 이해되지 않았다.

 

  앵보는 살상용 총의 손잡이를 잡고 일자로 만들었다. 파이프 형태가 된 총을 어깨에 걸친 앵보가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이마를 쓸어넘겼다.

 

  “너 때문에 우리 애들 걱정하게 생겼잖아. 달래주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02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잘못 아니야. 한 방 맞은 선생님 잘못이지. 그나저나 선생님이 잘 싸울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 괜히 인기쟁이가 아니야.”

 

  “나는 우리 애들 인기면 충분해. 너희 같은 놈들은 죽어도 사양이다.”

 

  앵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성이 울렸다. 02는 바로 자신의 옆에 박힌 총알을 봤다. 앵보는 웃으며 비살상용 총을 집어넣었다.

 

  “다섯 번 끝. 이제 봐주는 거 없다.”

 

  02는 웃으며 공격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두 다리가 뻐근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앵보는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02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앵보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어폰을 꽂지 않아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노래 부르며 다가왔다. 아무리 그가 전투에 능한 자라 해도 사람의 감각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앵보는 알지 못했다. 결국 승자는 자신이있다. 02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총을 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팔과 다리, 어깨 순으로 아래로 축 처졌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부품이 차례대로 망가지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우리 애들이 허튼 약속 안 한다고.”

 

  앵보는 다 보인다는 듯 총구로 02의 넥타이를 가리켰다. 02는 넥타이를 내려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무늬 없던 넥타이에 붉은 눈 부분이 생겼다. 02는 이를 깨물었다. 그의 부하에게서 갖고 온 넥타이에 이런 장치가 숨어있을지 몰랐다.

 

  앵보는 눈을 가린 머플러를 풀었다. 앵보의 눈으로 기억을 읽고, 기술을 훔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02의 눈이 자동으로 감겼다. 몸의 통제권이 바이러스에게 점령 당했다. 프로그램의 명령으로 02는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쓰러졌다. 땅바닥 쪽으로 얼굴이 떨어져도 눈을 뜰 수 없었고, 몸을 짚고 일어날 수도 없었다. 02는 몸에 있는 부품들이 차례대로 망가지는 걸 느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각이 차단되고, 인공지능 프로그램도 종료됐다. 음성과 인지 프로그램은 아직 작동됐다. 앵보의 발은 02의 머리를 밟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02에게 말할 자유도 없었다. 프로그램이 하나씩 종료될 때마다 02은 자신이 죽인 앵보의 부하들을 떠올렸다.

 

  02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앵보를 그리 믿고 신뢰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둬도 앵보를 원망하지 않았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의 부하가 되고 싶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두터운 신뢰 관계를 부술 수 없다면, 그 구심점이 되는 앵보를 없애버릴 걸 그랬다. 그가 분노하고 절망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그게 자신의 종말을 부를 줄 몰랐다.

 

  죽으면 다 끝난다. 기계는 물론 인간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죽으면 아무것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런데 앵보는 죽은 부하들의 모든 걸 끌어안고 살아있었다. 그들이 못다 이룬 걸 자신이 이루겠다는 듯 꿋꿋하게 살아갔다. 그런 두목이 여전히 살아있기에 죽은 부하들은 여전히 남아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음성 프로그램도 종료되고, 이제 남은 건 인지 프로그램만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공장에 자신의 데이터를 백업해뒀다. 앵보에게 죽었다는 기억은 잃겠지만, 다시 살 수 있었다. 이젠 5번 봐주는 게 없으니 어떻게 만날지 궁금했다. 02는 앵보와 다시 만날 일을 기약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이미 02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가 백업한 데이터까지 날려버렸다.

 

  앵보는 02를 편히 보내고 싶지 않았다. 부하들을 생각해선 최대한 고통스럽게 보내고 싶었다. 앵보는 일부러 급소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총을 쐈다. 살사용 총이 소리도 없이 02의 머리를 관통했다. 머리에 피가 나지 않았다. 총을 맞은 자리엔 구멍이 났고, 그 구멍 사이로 정교한 부품들이 보였다. 부품 사이를 연결하는 전선이 끊어지며 작은 불이 난 게 보였다. 앵보는 02가 매고 있는 검은 넥타이를 풀었다.

 

  02의 눈동자는 프로그램이 종료되듯 사라졌다. 안에 난 작은 불은 여기저기 번져나가더니 이내 큰불이 되었다. 앵보는 02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 먼지가 들어가 눈을 살짝 비볐다. 눈이 충혈되고, 살짝 눈물이 맺혔다. 앵보는 검은 넥타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형님, 무슨 일이 있어도 너무 많이 울지 말아요. 울지 말고, 평소처럼 웃어요.

 

  언제 이런 약속을 했는지 기억 나지 않았다. 너무 흘린 눈물이 많았고, 너무 많이 웃은 날도 많았다. 언제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약속한 건 선명히 기억났다. 앵보는 자신의 흰 넥타이 위에 검은 넥타이를 맸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듯, 두 넥타이가 꼭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애들 보고 싶다.”

 

  앵보는 검은 넥타이를 매만지며 향아치가 있을 곳으로 걸어갔다. 앵보는 숨겼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냄새 싫어하는 동료가 있으니 마음껏 필 수 있는 건 이때뿐이었다. 그의 모습은 전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당당하게 앞을 보며 걸었다. 내뱉는 숨도 한숨이 아니었다. 부하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를 했다는 희열이 공존했다. 허무한 감정은 없었다. 그저 02의 손에 죽었던 부하들의 눈이 전부 넥타이로 가린 게 떠올랐을 뿐이었다.

 

  형님. 끝까지 살아야 해요. 그래야 다시 태어나도 형님의 부하가 되죠. 이번에도 우리가 형님 찾아갈게요.

 

  앵보는 미소를 지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여전히 인생에는 새로운 인연들이 가득했다. 그걸 지켜내며 살아가는 게 즐거웠다. 오래 살아야만 죽은 부하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그가 살아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앵보는 담배를 입에 물며 앞만 보고 걸었다.

 

  “이야, 남의 기술을 가지고 잘도 발전했군.”

 

  깨끗한 남궁혁 몸과 다르게 48의 몸은 상처로 가득했다. 뇌공에 맞은 침 때문에 자꾸 몸에서 에러가 났다. 기가 뒤틀린다는 게 이런 걸지도 몰랐다. 48의 왼손에 매단 칼에서 피가 뚝뚝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48은 괴물처럼 서 있었다. 48의 눈은 여전히 남궁혁을 향하고 있었다. 이젠 인공지능이 공격을 예측하지 못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번뜩였던 푸른 렌즈는 서서히 흐릿해졌다.

 

  “자네가 뭘 알겠나. 나 같은 것들은 평생 이룰 수 없는 경지를…….”

 

  남궁혁은 왜 하나같이 악의 말들이 똑같은 레파토리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더는 듣기 싫었다. 남궁혁이 48에게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48은 천경검을 꽉 잡았다. 48의 손이 으스러지며 망가지는 소리가 들려도 48은 검을 놓지 않았다.

 

  “여전히 성격 급하네. 뒷말을 더 듣지 않고 공격하는 건 너무 하지 않나.”

 

  남궁혁은 48의 팔이 허리 뒤로 숨기는 걸 봤다. 48은 남궁혁의 시야를 확인하고, 신발에 숨긴 날붙이를 꺼낸 채 그대로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48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신발에 나온 날붙이는 남궁혁의 다리를 찌르기는커녕, 오히려 막혔다. 48은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내공을 많이 쓰게 했는데도 그는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그의 체력을 닳게 만들고, 주화입마에 빠지게 하려 했는데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남궁혁은 웃으면서 48을 내려다봤다.

 

  “남의 기술을 따라 하는 잡배 놈에게 내가 쉽게 지칠 줄 알았는가.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겠지만, 그저 도적놈에게 지나지 않지.”

 

  “나를 죽여도 소용 없을거네. 나를 따르는 자들이 아직 중원에 있어.”

 

  “남궁 또한 중원에 있지. 잡배의 명성은 그저 동네에 머물지 않겠나. 애써보게. 잡배의 이름은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대남궁세가 삼공자 남궁혁의 이름은 오랫동안 중원에 머물테니.”

 

  남궁혁의 발밑에 깔린 날붙이는 부서지고, 천경검에 가해지는 힘은 점점 세졌다. 천경검이 목에 있는 흉터에 닿았다.

 

  “추악하네.”

 

  남궁혁의 말과 함께 48은 움직이지 않았다. 남궁혁은 천경검에 뇌공을 불어넣은 채 48의 머리를 내리꽂았다. 백업 장치까지 완전히 소거한 뒤에 남궁혁은 검을 한 번 휘둘렀다. 검에 묻은 피가 땅에 떨어졌다.

 

  “대감.”

 

  “어르신.”

 

  향아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앵보는 손을 흔들고, 남궁혁은 뒷짐 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앵보는 향아치 앞에서 종료된 91을 봤다.

 

  “어르신, 무기 수거 했어요?”

 

  “자네가 잔소리해서 챙겼네.”

 

  “하하, 제가 여기저기 무기를 뿌리고 다니다 보니 이해해주세요. 다 같이 좋은 무기 쓰면 좋잖아요.”

 

  “그 무기를 기계들이 훔쳐 쓰니까 문제인 거 아니오!”

 

 “그, 그래도 그거 분해하면 폭발하니까 문제없어요. 우리 애들이랑 저만 아니까요.”

 

  “앵보 공. 그것 때문에 우리가 자네 엄호하는 거 알지? 자네 눈만 보면 기밀 캐내고 싶은 기계들이 한가득이네만.”

 

  “대, 대협까지…근데 대협도 마찬가지잖아요. 기계들이 궁혁이라 그러면 남궁혁이라며 다 때려 부수잖아요!”

 

  “어차피 부술 거 아니었나.”

 

  “대협. 제가 왜 아직도 대협이 주문한 초전도체 칼을 아직 완성 못 한 이유 알고 그러는 거죠?”

 

  “자네 설마 이번에도 온 그 무림인 기계도 박살냈나.”

 

  “기계는 원래 고장 나면 때려서 고치는 법이네!”

 

  남궁혁 말에 둘은 또 박살 냈다는 걸 알았다. 앵보는 대충 손으로 머리를 털면서 91로 갔다. 본인도 02를 태워 먹어서 할 말이 없었다. 사람의 심장이 있는 위치에 초전도체가 있었다. 앵보는 표정 변화도 없이 초전도체를 꺼낸 뒤 손수건으로 닦았다.

 

  “앞으로 몇 개 더 남았나.”

 

  남궁혁 말에 앵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5개였나? 학교 가야 정확하게 알 거 같아요. 길이를 고려해야 하니까…대협. 단검이라고 했나요?”

 

  “응. 단검이지.”

 

  남궁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향아치는 남궁혁이 매고 있는 천경검을 보며 물었다.

 

  “자네 중검 쓰지 않나. 왜 단검인가?”

 

  “전투에 쓸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만드는 거라.”

 

  “네?”

 

  “엉?”

 

  “왜 그런 눈으로 보나?”

 

  “대협. 설마 장식용은 아니죠?”

 

  “아, 초전도체로 만든 검으로 뇌공 쓰면 내공을 더 효율적으로 쓰지 않겠나. 그걸 알아보려고 하는 거네.”

 

  MZ 무림인이라 그런가. 생각하는 발상도 남달랐다. 앵보는 필요한 부품을 더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향아치의 호패에서 화살표가 나왔다. 향아치는 지도까지 보려고 했지만, 호패는 고집스럽게 화살표만 보여줬다. 여러 번 호패에 적힌 글씨를 눌러보고, 끈까지 잡아당겨도 소용없었다.

 

  “자네들꺼도 가끔 말을 안 듣나?”

 

  “네…뭐…….”

 

  앵보는 말끝을 흐렸다. 가끔 옷이 심하게 찢어질정도로 싸울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넥타이가 자동으로 다른 의상으로 바꾸는데 별별 옷이 나왔다. 슬픈 건 본인이 돌린 룰렛에 나온 결과로 만든 옷이라 받아들여야했다. (물론 멋진 옷들도 있지만) 다행히 이 둘에게 아직 보여준 적이 없었지만, 앞으로도 보여줄 마음도 없었다.

 

  “나는 그냥 쓰지 않네.”

 

  남궁혁은 천경검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환원 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기본적으로 ‘뮤즈’라 불리는 물건이 있었다.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었다. 자신이 찾으려는 정보를 한 번에 찾을 수 있어 본인들의 지식이나 필요 기능을 뮤즈에 넣었다.

 

  뮤즈는 선생들의 뇌 신경과 연결되어 있어, 선생이 필요한 걸 찾으면 바로 전달했다. 선생들의 제2의 뇌라 불리고 있어 약점이 되지만, 강점이기도 했다. 그 밖에도 전투 보조나 연구 보조 등 다방면으로 쓰여 학교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뮤즈 사용하는 법도 가르쳤다. 물론 시험 볼 때는 뮤즈를 쓰면 부정 행위라 비활성화 모드는 필수다.

 

  남궁혁은 이 뮤즈를 잘 안 쓰는 편인데, 학교에서 사용을 권장해서 일단 집어놓고 잘 안 쓰는 편이었다. 향아치는 뮤즈가 간편해서 쓰지만, 뇌 신경과 연결된 게 껄끄러웠다. 본인 재주가 많기도 해서 의존하려고 하지 않지만, 본인 지식이 방대하다 보니 종종 썼다. 앵보는 뮤즈를 잘 쓰는 편이었다. 뮤즈에 본인의 의학 기술을 집어넣어 부상 시에 자동으로 치료하도록 했다. 특히 담당 학생인 앵두들에게 개방적이라 본인 뮤즈에 여러 정보와 기능을 넣어도 내버려뒀다.

 

  향아치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본인은 지도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영감(향아치가 부르는 이름)은 고집스럽게 화살표만 보여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호패가 알려주는 대로 걷기로 했다.

 

  지하도시는 미로처럼 여기저기 복잡했지만, 화살표는 기가 막히게 길을 잘 찾았다. 길 중간에 횃불이 없다면, 사람이 사는 곳이라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주치지 않았다는 건 시민군들이 사람들을 데리고 잘 대피했다는 뜻이었다. 셋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그러다 앵보는 궁금하듯 둘에게 물었다.

 

  “근데 대협과 어르신은 선생님 호칭 익숙해요? 전 아직도 소름 돋아요.”

 

  “나야 뭐, 중원에 있을 때랑 별 반 차이가 없어서.”

 

  “소관도 그렇소.”

 

  관리와 무관이라 그런가. 앵보는 본인만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향아치와 남궁혁은 말없이 앵보를 바라봤다. 그리 말하는 앵보도 조직에 몸 담았던 이였다. 적어도 부하 가르칠 일이 있을 게 분명했다. 선생이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듯했다.

 

  “앵보 공. 자네도 군인이지 않았나. 상관으로서 부하들을 가르치지 않았나.”

 

  향아치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관무의 말과 반응에도 앵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가르쳐요? 애들 기본적으로 총 쏠 줄 아는데.”

 

  향아치와 남궁혁은 처음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앵보의 반응 보고 자신들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 명은 관리로서, 한 명은 무인으로서 자신들이 제일 화나는 부분을 콕 집어 윽박질렀다.

 

  “갈! 무기 다루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안 가르쳐 줄 수 있단 말인가!”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에게 보고하면 되는지 그런 것도 없단 말이오!”

 

  “아, 아니. 기본적으로 무기를 써야 살아남고, 보고는 주로 저한테…아니, 근데 이게 화낼 일이에요? 제가 그렇게 무책임한 두목으로 보였어요!”

 

  앵보의 말에 남궁혁과 향아치는 헛기침을 했다. 잠시 본업 때문에 흥분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호패가 알려준 대로 걸었다. 이 마을을 통해서 목적지에 가깝게 갈 수 있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한참을 걷다 호패의 화살표가 아래쪽으로 향했다. 다른 방향으로 바꿔도 여전히 아래쪽을 가리켰다.

 

  앵보는 본인 무기를 파이프 형태로 바꿨다. 땅을 꾹꾹 찔러보다 한 곳의 느낌이 달랐다. 다른 곳은 푹신하고 딱딱한 땅의 감촉인데, 한 곳은 뭔가 파묻었는지 살짝 위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앵보가 파이프로 땅을 툭툭 쳤다. 남궁혁이 표시된 곳을 내공 실은 주먹으로 살살 때리자, 땅이 갈라지며 보자기가 보였다. 향아치가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꺼냈다.

 

  흙 묻은 보자기를 탈탈 털 때마다 먼지 때문에 자꾸 기침이 나왔다.

 

  “안에 뭐 들었는지 확인하면 안 돼요?”

 

  앵보가 보자기를 손으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럴까. 중요한 물건이라 그랬으니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남궁혁이 말했다. 향아치는 앵보와 남궁혁을 보고 혀를 찼다.

 

  “무슨 소리요. 이런 건 원래 그대로 들고 가는 것이오. 하나라도 잘못되면 우리 책임이 되는 거 모르오.”

 

  향아치는 자신의 말과 다르게 벌써 보자기를 풀고 있었다. 앵보와 남궁혁이 탐관오리라고 말하는 걸 들었지만, 향아치는 신경쓰지 않았다. 보자기가 풀리자, 셋은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래진 종이 뭉치들 위로 호패 하나가 있었다.

 

  “엉?”

 

  향아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호패를 쥐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향아치는 두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호패에 적힌 이름을 읽고 또 읽었다.

 

  “좋은 건가?”

 

  “비싼 거예요?”

 

  남궁혁과 앵보는 향아치가 손에 든 물건을 발견했다. 호패였다. 앵보는 향아치가 든 호패를 보고 아는 사람인가 했다. 남궁혁은 중원 출신이라 한자를 알고 있었다. 중원 한자가 한국 한자가 다르지만, 그는 그 호패에 적힌 한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향아치는 멍하니 자신이 잡은 호패를 바라봤다. 상아로 만들어진 호패였다. 끈이 많이 낡고, 상아에 새긴 글자는 조금 훼손됐지만, 호패는 사대부처럼 지조를 지키고 있었다. 세월에 흘러 낡은 물건이 됐지만, 호패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이름과 출신을 지키고 있었다.

 

  향아치는 말없이 호패를 계속 바라봤다.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자신의 물건이었다. 여기로 넘어와 새로 만든 호패와 그 시대에 남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호패가 있었다. 과거던, 현재던, 미래던 향아치의 흔적은 어디에든 있었다.

 

  향아치는 고개를 들었다. 흙벽에 가로막혀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향아치는 보자기에 있는 물건들을 더 살펴봤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고, 보자기에 있는 낡은 종이들은 그의 손에 닿을 때마다 얇게 부서졌다. 향아치는 더 건들지 못하고, 다시 보자기를 멨다. 과거의 흔적들이 바스러질 때마다 본인의 한 부분도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앵보 도령. 위로 올라가는 방법 있는가?”

 

  향아치 말에 앵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따라오세요.”

 

  호패가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앵보는 나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지하 생활의 이점이었다. 지하로 나가는 통로에서 앵보가 입을 손가락에 갖다 댔다. 앵보는 귀를 통로에 갖다 댔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자, 이번에는 손을 갖다 댔다.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영차.”

 

  통로로 나가는 문이 열리고, 햇빛이 들어왔다. 지하보다 더 밝은 지상에 눈이 잠깐 부셨다. 이 넓은 터를 두고 어디를 갔는지 돌아다니는 기계도 보이지 않았다. 앵보 순으로 향아치, 남궁혁이 나왔다. 그들이 나온 곳은 아주 넓은 땅이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하나 없이 황량한 곳이었다. 앵보는 살면서 이렇게 넓은 터를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넓어서 기계들도 잘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궁혁은 말없이 땅을 봤다. 중원에 있을 때는 이런 곳은 언제나 시체들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여기는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평화롭게 넓은 땅을 보는 게 오랜만이었다. 앵보와 남궁혁은 잠시 넓은 터를 보면서 지쳤던 마음을 달랬다.

 

  호패가 반짝이며 향아치 앞으로 모니터를 띄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보여주지 않았던 지도였다. 지도에는 이 땅의 주인이 누군지 알려줬다. 호패를 쥐던 향아치의 손이 아래로 향했다. 지도와 황폐한 땅을 번갈아 봐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호패가 깜박거리더니 이내 지도가 사라졌다.

 

  나라의 역사가 시작한 곳이자 자신의 인생을 몸담은 곳이었다. 여러 역사가 있던 공간이, 나라를 이끌어 갔던 거대한 곳이 이젠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앵보와 남궁혁은 힘없이 주저앉은 향아치를 보고 둘은 당황했다. 왜 그러냐는 둘의 말에 향아치는 눈물만 흘렀다. 그의 눈물에 앵보와 남궁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둘 앞에 다시 지도가 띄어졌다. 중세국어가 아닌 한글로 적혀 있었다. 지도에 적힌 글을 복 앵보와 남궁혁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향아치가 다녔던 길들은 이젠 폐허가 되었다. 둘은 말없이 향아치 옆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았다.

 

  “폐하…….”

 

  향아치는 흐느끼며 땅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좌에 앉아있는 황제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  같았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온화한 미소로 향아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넓었던 궁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춧돌은 물론 기와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궁궐에 심어둔 나무도, 꽃도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았던 그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곳에 넓은 궁궐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대한제국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개만 들면 다시 궁궐이 있고, 같이 일하는 관리들이 뭐하냐고 타박할 것 같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일하러 가고, 퇴청하는 변함없는 하루는 머나먼 기억이 되었다.

 

  향아치는 제국 때 썼던 호패를 꽉 쥐었다. 그가 입는 옷은 관복이지만, 자신이 모시는 황제가 없었다. 향아치는 도저히 얼굴을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향아치는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제국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본인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에 허상으로 남은 망국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 조선의, 제국의 흔적은 이젠 본인 자신밖에 없었다. 벌개진 눈으로 향아치는 고개를 들었다.

 

  어좌에 앉은 황제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허상일지라도 향아치는 천천히 절을 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향아치는 예를 올린 뒤 천천히 물러났다. 황제에게 등을 돌린 채 걸어갔다.

 

  과거인, 부디 과거로 돌아가길 바라네. 과거로 돌아가서 우리로부터 제국을 지키게. 그렇지 않으면, 다시 여기로 불러오지 않겠나.

 

  걸을 때마다 91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향아치는 뒤를 돌아봤다. 아까까지 있었던 궁궐은 보이지 않았다. 하하, 웃음만 나왔다. 91이 지키라는 의미가 이런 의미일 줄은 몰랐다.

 

  향아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학교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땅은 황폐해졌다. 잘 닦인 길도 없어지고, 사람들의 집과 상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왜 궁궐은 무사할 거라고 막연히 믿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앵보 도령.”

 

  “네?”

 

  “여기 궁궐이 없어진지 얼마나 됐나.”

 

  향아치 물음에 앵보는 뺨을 긁적였다. 대답해주고 싶어도 본인이 아는 게 없었다. 문화재 소실이 대대적으로 있던 건 본인이 태어나기도 전인 걸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문화재와 같이 박물관, 미술관도 통째로 없어졌다.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몰라 앵보는 일단 자신이 아는대로 말했다.

 

  “아마 백 년 정도 됐을 겁니다. 기계가 반란 일으킨 지 얼마 안 됐을 때, 과학자들을 대거 살해하다가 갑자기 문화재 부수고 불태우고 그랬다고 들었거든요. 특히 밖에 위치한 문화재들이 빨리 소실됐다 들었는데…아마 여긴 궁궐이라 더 빨리 없어졌을 겁니다.”

 

  “…그렇구먼.”

 

  향아치는 한참이나 하늘을 바라봤다. 남궁혁과 앵보도 일어나 그의 뒤에 섰다. 하늘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푸른 하늘 위로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게 보였다. 따가운 햇빛과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었다. 하늘은 이렇게 평화로운데 여기 땅은 난장판이었다. 최종적인 목표는 생존이지만, 거기엔 각자의 목표가 있었다. 지키기 위해서, 흔적을 남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각자가 한 약속과 신념을 위해서 오늘도 살아있었다.

 

  “자, 돌아갈까?”

 

  “돌아갈까?”

 

  “돌아갈까요?”

 

  셋이 서로를 보며 동시에 말했다. 셋은 하늘을 향해 호탕하게 웃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는 각자 일들 하며 자신들을 기다리는 제자들이 있었다.

 

  대협. 대협. 오늘은 무슨 수행 해요?

 

  대감님. 가배 좀 드시면서 하세요.

 

  두목, 두목. 이거 봤어요?

 

  언제나 자신들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하루는 잘 지냈는지 궁금했지만, 안부는 집어넣기로 했다. 어김없이 똑같은 하루였고, 돌아가면 자신들을 반겨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달라질 게 없는 하루라도 소중한 인연들과 보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솔직히 외근보다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더 즐거웠다. 생각만 해도 자꾸 미소가 나왔다.

 

  인연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각자 태어난 날도, 성장 환경도 다르지만, 한 사람을 알게 되고 그 중심으로 모이고, 다시 인연을 쌓아가며 살아간다. 본인 스스로 선택한 스승이기에 더 후회가 없다. 언제나 과거의 추억은 노을처럼 아름답다. 잠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추억을 곱씹으며 버틸 수 있다. 제자들에겐 스승은 그런 존재고, 스승 또한 마찬가지다.

 

  이제 학교로 돌아간다. 휴식 후 수업 시작이었다.

 

  “대협. 경공 써서 빨리 가면 안 될까요?”

 

  “전에 멀미 심하게 하지 않았나.”

 

  “앵보 도령. 멀미약 있는가? 깜박하고 안 들고 왔는데”

 

  “그냥 대협이 조금 천천히 가면 되지 않을까요?”

 

  “음. 나는 속도를 즐기는 편이 좋네만.”

 

  남궁혁의 말에 앵보와 향아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무 빨라서 둘이 저승사자랑 통성명하고 올 뻔했다. 학교에서 경험했던 가상현실 롤러코스터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전투 때는 속도 조절해주는데 퇴근이 신나서 그런지 그 속도는…기억만 해도 속이 더부룩해졌다. 앵보는 셋 중에서 제일 마른 향아치를 바라봤다.

 

  “어르신. 운동해요, 운동. 살아남으려면 체력도 필수입니다..”

 

  “소관 운동하네.”

 

  “정말인가?”

 

  향아치 말에 남궁혁이 진지하게 물었다. 향아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앞장서서 걸었다. 뒤에서 앵보가 같이 가자고 외쳤고, 남궁혁은 고개를 저으며 뒤를 따라갔다. 남궁혁은 걷다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하늘은 화창하고 맑았으며 푸른색이었다. 남궁혁은 중원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다시 걸었다.

 

  “대협. 학교 가면 우동 먹을래요?”

 

  “우동보단 고기가 땡기는데. 고기 국수 어떤가.”

 

  “그냥 국밥 먹게.”

 

  “대협, 우리 그냥 양꼬치에 맥주 먹을까요?”

 

  “좋지. 근데 앵보 공 술 못하지 않았나?”

 

  “에이, 무알콜 있잖아요. 기분만 내면 되죠.”

 

  “무알콜이 어떻게 술인가. 그냥 음료수지.”

 

  “술 못 마시는 사람 배려 좀 해줘요.”

 

  “…자네들. 소관 까먹은 거 아니지?”

 

  “가끔은 젊은이들끼리 노는 게 좋지.”

 

  “그렇죠. 저랑 대협은 아직 20대잖아요. 청춘이죠.”

 

  “내 마음도 청춘이다, 버러지 같은 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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